일상에 지치고 관계에 힘든 내가 해야 할 일...
어릴 적 청평호였나, 아빠와 타던 보트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청평호 같은데 가면 사진과 같이 보트가 줄 지어있는 잔교;jetty가 있지요. 자그마한 물의 흐름에 부대끼는 보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편안함을 주곤 했습니다. 끼익끼익, 끼륵끼륵, 보트 탈 시간을 기다리며 잔교 위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보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름만 보트지 사실상 수상 자전거 수준인 오리보트 말고, 저는 배경 사진에 있는 노 젓는 플랫 보트를 좋아했습니다. 안개 가득한 보트 위에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호수 위 유선을 바라보면 무릉도원에 있는 기분이었지요. 아 물론 무릉도원이란 단어를 몰랐을 즈음이니 고냥 천국이라고 해 둡시다. 하지만 이내 모터보트 하나가 물을 세차게 가르며 우리 조그만 보트 옆을 지나갔고, 출렁이는 파도에 무게중심을 잃은 우리 보트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유유히 흐르던 보트 주변 물의 흐름도 갑자기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어린 저의 마음도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겁을 많이 주워 먹은 것이지요.
태풍이 다가오면 보통 해상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바다 저 멀리 정박하고 있는 바지선;barge의 닻;anchor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조그마한 페리보트를 타고 나가 봅니다. 헌데 이미 태풍이 예고가 되어 있다면 바다의 파고는 1-2m를 넘은 상태고, 막상 바다에 나가보면 헤밍웨이 소설 속의 녹새치 잡던 노인처럼 파도와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평소 티격태격하던 페리보트 선장 아저씨가 소리치는 조언에도 아주 얌전하고 고분고분하게 따라갑니다. 멀미는 나고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은 보트 위 사람을 지독히도 내리 보고, 바닷물에 반사된 또 하나의 태양도 그를 옹골차게 올려다봅니다. 손은 기둥을 꼭 잡고 있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입니다.
며칠 후 태풍은 몰아닥치고, 그 큰 바지선의 닻도 해저면을 기익기익 긁어가며 슬슬 움직여지기 시작합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해안가를 순찰하다 보면 어디서 온 지 모르겠는 크고 작은 배들이 모래사장에 종종 박혀있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과 바다는 고요하고, 동네 아이들은 그 배에 올라타 자신들만의 놀이터를 만들어 놀고 있습니다.
이렇듯 태풍이 예보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파제;breakwater로 둘러 쌓여 외해의 영향을 받지 않는 피난처;harbor 같은 곳에 가야 합니다. 항구에 큰 돌멩이나 콘크리트 케이슨, 테트라포트 등으로 방파제를 만드는 이유는 밖에선 아무리 높은 파도가 몰아 치더라도 그 방파제 안에 있는 물은 고요히 유지시켜 주는 데에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더 와 닿지 않은가요, breakwater. 때문에 평소 배들이 별로 없는 한적한 항구도 여름 태풍철이 되면 크고 작은 배들로 바글바글합니다. 항구에 들어올 수 없는 큰 배는 어느 자연 항구, 그러니까 만;bay 같은 곳을 잘 찾아 숨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 위에서 배는 철저히 피동적입니다. 헌데 우리네 인생도 조금은 그러한 면이 있지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가에 비친 햇살을 바라보며 싱그런 조팝나무 사이를 걸으며 출근하는 마음은 평온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며 상대방의 송곳 같은 한 마디, 밤 새 몇십 개 날아와 있는 이메일, sns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포스팅, 혹은 댓글을 보다 보면 나의 마음도 조금은 흔들리기 마련이지요. 고게 상사의 꾸지람이나 질병 따위의 태풍 같은 수준의 공격이 들어온다면 나으 그 평온했던 마음은 난데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피난처;harbor를 찾아야 합니다. 없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방파제를 만드는 데 보통 3년에서 5년이 걸립니다. 우리네 마음의 피난처도 하루아침에 누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것은 책이 될 수도 있고 자전거가 될 수도 있고 여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게임이 될 수도 있고 술 담배가 될 수도 있고 쇼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내가 피할 곳이 존재한다면, 지금의 이 난기류도 내 마음에 큰 타격을 입히지 않고 스쳐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외부에 의한 충격이 가해졌을 때 나는 어떤 피난처를 가지고 있는 가. 오늘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 출처 : yewkwang.photoshelter.com/image/I0000uzNHKs3lI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