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서 1월로 달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날 다 같이 나이를 먹는다. 그러므로 나도 얼마 전, 나이를 한 살 먹었다. 거부할 수도 없고 다시 반납할 수도 없는 이 나이가 강제로 쥐어짐이 올해는 유난히 서럽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큰 감흥이 없는 편이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가장 매력을 뿜어낼 수 있는 30대가 아닌가. 나이가 든다 하여 늙었다고 표현하기엔 활력 있는 청춘이다. 그런데 어쩐지 2022년은 느낌이 다르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슬슬 몸이 삐걱거리고, 몸의 이곳저곳 하나씩 고장 나는 것이 느껴진다. 소설 '에브리 맨'에 나왔던 문장, '노년은 대학살이다.'가 떠올랐다. 나에게도 서서히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난 아직 반짝이는 '젊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누가 봐도 이제 난 '젊음'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서글픈 나이다.
내가 서글픈 것이 단순히 이런 건강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며 찾아오는 다양한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몸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거울을 보면 알게 되는 외모의 변화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사실 건강을 잃어가는 것보다 외모의 노화가 더 서글프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쁘고 싶다'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 역시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이고 싶지만 나이와 함께 찾아오는 노화를 막을 길은 없다. 풍선 빠지듯 사라지는 볼살, 늘어가는 주름살, 칙칙해지는 피부까지... 세월 덕분에 나는 콤보 세트를 얻었다. 눈가의 주름이 신경 쓰여 웃음을 잃어가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이렇듯 노화는 비극이다.
이제 더 이상 외모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없는 나이가 되니 생각이 많아진다. 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이제 종말을 맞은 걸까? 반짝이는 빛을 잃은 나는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난 여전히 예뻐!'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럼 추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지금 나에게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아름다움이 눈을 통해 느껴지는 감상이라면 지금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가장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바로 고흐의 그림이다. 그럼 오늘은 고흐의 그림에서 아름다움의 흔적을 찾아봐야겠다.
어제 나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투우에서 소의 목을 찌르는) 창과 (황소의 머리에 다는) 꽃장식을 가지고 황소를 조련하는 투우를 보았다. 기마 투우사가 부상을 당하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는 회색 눈을 가진 금발 남자였고 아주 침착했는데, 그의 부상은 꽤 오래갈 것이라고 들었다. 그는 밝은 파란색과 금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나무속에 세 개의 형상을 그린 몬티첼리의 작은 기수처럼 말이다.
그 투우장은 햇볕이 내리쬐고 많은 인파가 있을 때 매우 아름다웠다.
1888년 4월 9일 테오에게 쓰는 편지 중...
반 고흐는 1888년 2월, 프로방스의 아를에 정착한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4월부터 아를에서는 투우 시즌이 시작됐다. (그 해 투우 시즌은 4월 1일 부활절 일요일에 시작하여 10월 21일에 끝났다.) 고흐는 이 기간 종종 투우 경기를 관람했다. 그가 관람했던 투우 경기 중 하루였을 이 그림의 주제는 고대 원형경기장에서의 투우이지만 경기 장면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주된 모티브가 대중들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투우 경기를 묘사해 지인들에게 쓰는 편지에 종종 담았는데, 표현을 보면 제법 자세하다. 투우 경기를 집중해서 관람했지만 그를 계속 경기장으로 이끌었던 것은 흥미진진한 경기만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격정적인 투우보다 햇볕이 내리쫴 황금빛을 띠는 모래와 경기장 안의 다채로운 군중들이 더 아름답게 담겼다. 화려한 색을 품고 있는 웅장한 군중들, 햇빛과 그늘의 효과로 황금빛 원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모습은 흡사 예술작품처럼 보였을 것이다. 투우를 보는 관객들의 살아있는 반응을 보며 고흐도 이 순간 살아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투우 경기장의 열기는 단조로운 고흐의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 오늘 아침 나는 꽃이 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에서 일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이 바람은 시간을 두고 다시 불어오곤 했다. 그 사이에 작은 하얀 꽃들을 모두 반짝이게 한 햇살! 이것은 정말 아름다웠다!
1888년 4월 11일 테오에게 쓰는 편지 중...
1888년 4월, 아를에서 머물고 있던 고흐는 봄의 따스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날 역시 자연을 바라보고 있던 고흐는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고 그 장면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는 인위적인 힘 없이 온전히 자연이 만들어내는 광경에 사로잡혔고 그곳에 머무르며 보이는 것을 눈에 담았다.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에 자두나무의 가지가 흔들렸다. 하얀 꽃들 사이사이에 봄의 햇살이 내리는데 이 그림에 그 광경이 오롯이 담겨있다. 따사로운 봄의 햇볕과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그림에 나 또한 매료된다. 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하던 고흐가 보았던 세상의 모습은 이러했을까. 당연히 눈부실 수밖에 없는 봄의 모습이지만, 이렇게 그림에 담긴 자연은 아름다움 이상의 경의로움이 느껴진다. 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찰나가 아니라 이렇게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만들어진다.
나는 요전 날 매우 차분하고 상당히 아름다운 것을 다시 보았다. 카페오레(담갈색) 피부를 가진 어린 소녀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잿빛 머리에 회색 눈이었다. 연분홍색 캘리코(날염을 한 거친 면직물) 블라우스 안에 곧고 단단한 작은 가슴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옷은 무화과나무의 에메랄드빛 녹색과 대조된다. 아주 촌스러운 여자로 순진한 매력이 대단해. 내가 야외에서 그녀가 포즈 짓게 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정원사) 역시 흙색을 띠었고 그녀는 더러운 노란색에 빛바랜 푸른색이었다. 어린 소녀의 카페오레 안색은 그녀의 분홍색 몸 보다 더 어두웠다. 어머니는 기막히게 아름다웠고, 그녀의 더러운 노란색과 빛바랜 푸른 자태는 눈처럼 하얀 꽃과 레몬처럼 노란 꽃이 눈부신 광장을 배경으로 햇살에 눈에 띄었다. 남프랑스는 못생기지 않았어.
1888년 8월 9일 테오에게 쓰는 편지 중...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된 아를은, 남프랑스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와 같은 대도시를 경험한 고흐는 시골마을인 아를에 새로움을 느낀다. 아를에 머문 초반, 이곳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그는 아를을 '멋없는 척하고, 비도덕적인 무심함'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곳의 매력에 젖어들며 점점 좋아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아를의 자연을 강렬한 그림들로 남기게 된다. 특히 아를에서도 인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는데 '이곳의 여성들은 정말 아름다워. 정말이야.'라며 그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편지 속 두 여인도 그들 중 하나이다. 두 여인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돈된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도 깨끗하지 못하고, 외모 또한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들을 눈에 담은 고흐의 감상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햇볕에 탄듯한 담갈색 피부를 가진 소녀와 흙색이라 표현했던 어머니의 모습은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누가 봐도 촌티가 묻어있을 시골의 아름다운 여인들은 아를의 자연을 배경으로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두 인물에 대한 그림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 글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들이 그려진 고흐의 그림은, 넘치게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것을...
코르 삼촌이 나에게 제롬의 프리네가 아름답지 않냐고 물었고, 난 차라리 이즈라엘스나 밀레의 못생긴 여자나 프레레의 작은 노파가 낫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프리네의 작품과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신체는 동물들 또한 가지고 있다. 아마 육체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이즈라엘스나, 밀레, 프레레가 그린 사람들 속에 사는 영혼을 동물들은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은 겉모습이 (질병·고통·슬픔·결핍 등에) 고통받더라도 마음의 풍성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제롬 이후에 조각상에 대해서 공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에서 이성의 흔적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그 작품에서 보이는 것보다 작업의 흔적이 있는 두 손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 코르 삼촌(코넬리스 마리누스_반 고흐 아버지의 동생) / 암스테르담의 미술상이자 서점상인)
* 이즈라엘스 (요제프 이스라엘스_Jozef Israëls / 네덜란드의 화가)
*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_Jean-François Millet / 프랑스의 화가)
* 프레레 (피에르 에두아르 프레레_Pierre-Edouard Frere / 프랑스의 화가)
1878년 1월 9일, 10일 테오에게 쓰는 편지 중...
코르 삼촌이 언급한 프리네는 프랑스의 화가 '장 레옹 제롬'의 '배심원 앞에 선 프리네' 그림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뒤의 조각상 이야기를 보아 편지의 프리네는 프랑스의 조각가 '알렉산드르 팔기에르'의 조각상인 것을 알 수 있다. 프리네는 BC 4세기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고급 창녀였다. ('헤타이라'라고 불리는 그리스 시대의 창녀는 몸을 파는 여인이 아니라 직업적인 접대부였다.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해 당대의 명망가들과 철학, 정치,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사교계의 여인을 말한다.) 프리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 그 자체로 회자될 만큼 경의로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와 화가들이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표현할 때 그녀를 모델로 세웠다고 하니 얼마나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을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을 증명하듯 프리네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은 빛나게 아름답다.
알렉산드르 팔기에르의 프리네는 몸의 곡선을 강조해서 아름다운 여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티 없이 맑고, 매끄러운 굴곡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육체는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만 같다. 고흐의 삼촌은 고흐에게 프리네의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그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프리네의 육체보다, 이성을 느낄 수 있는 못생긴 여자나, 작은 노파에게서 더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고흐는 프리네의 육체가 전혀 아름답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즈라엘스나 밀레, 프레레의 그림에 담겨있는 인물들에게서 고흐는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 고흐는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서 한 사람을 오래 연구하고, 여러 번 그리며 작품을 만든다. 이 시간이 단순히 스케치와 색감 연구만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고흐는 인물의 생활이나 삶, 감정까지 들여다보았는데, 그를 통해 한 인물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화는 외형의 모습을 뛰어넘어 내면의 이야기도 담게 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매끈한 피부와 몸매, 과장된 프리네의 포즈에서 고흐는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삶의 흔적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이 조각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내가 아는 고흐가 아니지. '못생긴 여자나, 작은 노파에게서 더 아름다움을 느낀다'라는 말이 참 그답다. 나 또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보다 고흐의 '아를의 노파'에게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림을 통해 영혼을 느낀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은 이렇듯 단순히 눈을 통해 느끼는 감정만은 아니다.
* '장 레옹 제롬'의 '배심원 앞에 선 프리네'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내적인 아름다움을 신경 써야 한다는 말, 이제는 너무 진부하다. 마음의 아름다움이 외모의 아름다움을 완벽히 채울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이 말의 시각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글을 쓰며 찾았던 고흐의 편지 중,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있었다.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은 겉모습이 (질병·고통·슬픔·결핍 등에) 고통받더라도 마음의 풍성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세월로 인해 비록 반짝이는 외모가 시들어 가더라도, 마음의 풍요가 나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참 아름답다. ) 과연 난 이 문장처럼 마음의 윤택함을 찾았을까?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연이 우리에게 추한 민낯을 드러내더라고,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제의 스트레스, 오늘의 고민, 내일의 걱정으로 나의 얼굴이 추하게 변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여전히 아름다운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 또한 세월의 흔적을 겸허히, 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나이가 들어 젊은 여인의 싱그러움을 따라갈 수 없다면 그 또한 어쩌겠는가 자연의 이치인 것을... 다만 얼굴엔 주름이 하나 늘어도, 마음의 주름은 하나씩 사라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순간을 담은 사진이 아닌 시간이 담긴 고흐의 유화처럼, 나 또한 시간을 담았기에 아름다운 여성으로 늙고 싶다. 그렇게 난 오늘도 고흐의 그림 속에 담긴다.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디에서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 Vincent Van Go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