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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는 맨몸으로 생존할 수 없다

by 탄만두


보호자 패션의 키워드는 언제나 편의성과 생존감

트렌드는 매일 바뀌지만 피곤함은 상시 유행




내 간병룩의 기본공식은

추리닝 + 반팔 + 가디건 + 크록스

가끔은 머리도 감지 못해 모자를 눌러쓰지만

보호자에게 옷은 꾸밈이 아니라 작업복이다.


대신 가방만큼은 잘 채워야 한다.

그 안에 내가 새벽을 버티는 방법들이 들어 있으니까.



비닐봉지

이석증 환자가 발작(어택)이 오면 대부분 구토를 병행한다. '토가 나올 정도로 어지럽다'는 건, 보호자 없이는 혼자 이동이 어렵다는 뜻이다. 준비물 1번은 비닐봉지다. 병원까지 가는 차 안에서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한다. 가방과 주머니에 비닐봉지를 하나씩 챙겨 넣는다. 반드시 손잡이 달린 비닐이 필요하다.


보조배터리

집에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보조배터리를 챙긴다. 보호자의 생명선은 휴대폰 배터리와 연결되어 있다. 부족한 정보력은 마음의 여유까지 함께 닳게 만들기 때문에.


엄마의 질병 포트폴리오 (지갑)

나의 지갑 속에는 작은 메모지가 한 장 있다. 항상 가지고 다녀서 내 지갑만 잘 챙기면 된다. 엄마의 이름과 생년월일, 만성질환, 수술 이력, 복용 중인약, 부작용이 나는 약까지 정리된 메모다. 손 때 묻고 너덜너덜해질 때쯤 새 종이에 옮겨 적는다. 디지털화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귀찮아서만은 아니다. 너무 본격적으로 '아픈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펜과 종이에 쓴 온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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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일회용 마스크를 하나 더 챙긴다. 한 번은 응급실 화장실에서 몰래 운 적이 있었다. 눈물 콧물에 젖은 마스크가 좀 싫었다. 뭐 이제는 울 일도 딱히 없지만. 그래도 여분 하나는 늘 챙긴다.


사탕/껌

내가 입이 마르지 않게, 혹은 당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보호자는 자주 식사를 놓치고 긴장하면 자연스레 입맛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임산부가 된 지금은 입덧 방지용이기도 하다.


양말

응급실은 생각보다 시원하다. 반팔의 의료진들이 뛰어다니기에 에어컨을 세게 트는 걸까. 아니면 수술실처럼 시원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엄마는 늘 춥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양말을 잊지 않는다. 가디건, 얇은 패딩, 스카프까지 챙길 여유가 있으면 더 좋지만, 정신이 없을 땐 양말 한 켤레를 꼭 넣는다. 어떤 응급실은 담요를 주지 않았던 적도 있었으니까.



사실, 응급실로 달려갈 때 가방안에

아무 생각 없이 쑤셔 넣은 것들이다.

그냥 안 챙기면 불안하니까.

내 불안과 함께 가방에 꾸역 꾸역 담았다.


나열해 보니

어쩐지 생존의 기술이었네.


이제는 습관처럼 챙기는 것들이지만

돌봄이 길어질수록 나도 모르게 진화했다.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듯, 나도 돌봄에 적응한 셈이다.

진화는 결국 살아남는 쪽이 하는 일 아닐까.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내일을 향해 다시 걸어간다는 뜻이다.

아주 천천히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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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건너며

누구나 자기만의 생존템이 있지 않나요?

오늘 하루 당신의 가방엔 어떤 것들이 들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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