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조금만 걸을 작정이었다. 점심에 1만 보라니. 화창한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아침에 미리 사 둔 호화로운 샐러드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시계를 올려다봤다. 12시 20분. 아직 점심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남아있었다. 얼마 전 본 유튜브에서 '식사를 마치고 어느 정도 몸을 움직여야 혈당이 오르지 않는다'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마침 공짜 쿠폰도 생긴 김에 편의점에 다녀오는 걸로 운동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식기를 정리하고 주섬주섬 외투를 입고 있는데, 할라피뇨 님이 산책을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동그랗게 뜬 눈과 엷게 번진 미소 속에서 '나가고 싶긴 한데 멀리 가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이 담긴듯했다.
'멀리 안 갈 테니 같이 나가요.'
혼자 걷는 것보다 둘이 걷는 게 더 좋기도 하고, 할라피뇨 님과 걸으면 걷는 맛이 더 나기도 해서 같이 걷자고 청했다. 그녀는 아담한 키와는 다르게 상당한 파워워킹 유저라서 함께 걸으면 자연스레 운동이 된다.
목적지는 청계천을 건너 영풍문고 뒤쪽에 있는 이마트24였다. 최근 통신사를 바꾸며 편의점 상품권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매장 수가 가장 적은 이마트24가 발행한 쿠폰이었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점인데도 꽤 걸어야 할 정도로 멀었다. 운동 삼아 다녀오기에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할라피뇨 님이나 나나 신호체계에 대해선 빠삭한 타입이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 여기 다음 저기가 켜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을지로의 신호등이 켜지는 순서쯤이야 이미 훤히 꿰뚫고 있었고, 덕분에 누구보다 빠르게, 멈춤 없이, 다이렉트로 편의점에 도착했다.
신나는 마음으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리 쉽게 공짜 커피를 내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커피 머신이 고장 난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주문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다음 목적지를 생각했다.
물론 이왕 간 김에 다른 커피를 사 마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겼다. 이대로 돌아가면 뭔가 진 기분이랄까? 게다가 최단 거리로 이동한 탓에 운동도 별로 안 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다음 목적지를 찾았다. 을지로 입구점, 회사에서 몇 블록이나 더 떨어진 조금은 먼 곳이었다.
이번에도 최단 거리를 이용했다. 점심 산책러들의 고속도로 격인 청계천 아래 산책로로 진입했다. 신호를 기다리지 않으므로 한 번에 을지로 입구까지 갈 수 있는 경로였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얼마 전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무척 미끄럽다는 점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아찔할 때마다 작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할 정도로 위험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요즘 들어 외할아버지를 들먹이며 패륜스러운 농담을 했던 게 떠올랐을 뿐이다. 위험한 순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죽을 뻔했네'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서, '아 외할아버지 살짝 보였다' 정로로 바꿔 쓰곤 했는데, 그 장난이 입에 배어버린 것 같다.
어쨌든 편의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외할아버지를 두 번 이상 만났다. 바닥이 미끄러워 신경 쓰며 걷다 보니 평소보다 체력이 더 빠졌다. 발바닥에 살짝 저린 느낌이 드는 걸 보니 벌써 5천 걸음 이상 걸었나 보다. 시계는 벌써 1시를 넘어섰다.
두 번째 편의점의 커피 머신은 쌩쌩했다. 첫 번째 지점보다 머신도 훨씬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조금 더 높았다.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는데, 문득 할라피뇨 님에게 약간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멀리 오고 싶진 않았을 텐데.
그러나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말로는 조금 많이 걸은 것 같다고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뼛속까지 파워 워커!
되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수월했다. 신호가 있는 대로로 오다 보니 중간중간 쉬는 틈이 생겼다. 회사에 도착해 몸을 녹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거기까진 안 갔을 텐데. 역시 멀리 갈 땐 함께 하라는 말이 틀리지 않구나.'
그리고 하나 더, 중간중간 쉬면서 가야 멀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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