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첫 버스킹 1

by 위키별출신

몇 개월 전, 그가 말했다.


“유명하지 않은 팝송을 연주한다고? 제정신이야? 유명한 팝송을 연주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호응을 얻고 엽전을 받아내는 게 버스킹의 정신이잖아.”


“시끄럽네.”


“참 나, 왜 알려지지 않은 외국 밴드를 네가 무료로 홍보해주고 있냐. 무슨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무슨 상관이야.”


“대중이 좋아하는 곡을 해야지. 안 되면 타협이라도 하든가.”


“그건 그렇긴 해. 그래서 가끔 유명한 곡도 연주를 한다고. 연주를 안 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곡도 연주하고 있어. 그런 것조차 못한다면 도대체 버스킹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내가 좋아하는 곡을 알리지도 못하고 남이 좋아하는 곡만 해줘야 한단 말야? 그게 난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럴려면 뭐하러 버스킹을 해? 회사를 다니고 알바를 하지.”


“그러니까 네가 유명해지지도, 많은 수입을 얻지도 못하는 거야. 대중의 입맛대로 맞춰줄 수 있어야지 네가 원하는 것에도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는 거야.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무명의 카피밴드로 끝나고 싶은 거야?”


“난 아마추어야. 넌 작곡가니까 그런 면을 신경쓸 수밖에 없고 써야 하지만, 난 취미라고. 취미는 취미답게, 자기 만족에나 신경쓸 테니까.”


그 다음에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긋지긋해하는 표정만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말도 맞는 면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프로는 될 수 없다.


무엇을 내 직업으로 삼을 것인지 알아보는 방법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먼저 원을 하나 그리고 내가 잘 하는 것을 적어내려간다. 다음 서클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활동을 적는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원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적는다. 그러면 중간에 겹치는 게 있을 텐데 그게 내 직업이다. 버스킹은 두 가지 원에는 들어 있었지만 마지막 원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고, 그 점이 눈에 띈 작곡가는 이를 다듬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는 그의 말을 따를 의지가 없었다. 내게는 그것 대신 쓸데없는 선비정신이자 출중한 고집에 가까운 것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걸 못한다면 도대체 내가 태어난 이유가 뭐지? 남의 비위를 맞춰 돈을 벌어야 한다면 프로는 될 수 있겠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하게 되는 거라면, 편의점 가서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것과 그다지 차이도 없는 의미 없는 활동 아닌가?


앞서 나는 호스텔에서 내 자존감을 부스트하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적었는데, 되돌아보면 나는 이 분야에서는 내내 길을 잘못 들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그로 인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평하기보다는, 잘 모르는 곡이 나와도 좀 듣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 대다수이니 그다지 티가 안 났던 것일 수도.


그러나 앞서의 전제와 호스텔에서 ‘한국곡’으로 꽤나 선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곡으로 노래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팝송으로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른 곡은 미국 인디 팝 가수인 Lucy Schwartz의 Black rose였다. 한국에서도 공연할 때마다 ‘혹시 자작곡이에요?’라는 말을 들었던 노래다. 미국 차트에서도 29위를 기록했었고, 애초에 이 가수 자체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난 무척 좋아하지만.


이 싱어송라이터의 곡들은 전부 아름다운데 특히 Black Rose는 드라마 내쉬빌에서 아동학대 피해자 역할을 맡은 클레어 보웬의 대표곡 중 하나다. 나에게 검은 장미(사랑이 아닌 악영향의 은유인 듯.)만을 주는 당신을 이제는 떠나야 겠다는 내용으로, 무척 돋보이면서도 사무치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나는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었고 이후 함께 버스킹을 하는 피아노 담당을 설득해 거의 억지로 이 곡을 버스킹에 활용해 왔다. 반응이 좋을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지만 나는 줄곧 이 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이 곡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호스텔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해봤지만 해당 곡은 커녕 해당 가수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다. 혹시 현지인은 알고 있나 싶어 그간 안면을 트고 지내게 된 조지안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장 조사가 안 좋게 끝났음에도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조지안이 좋아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곡을 연주했다면 훨씬 나은 결과로 이어졌으리라는 걸 지금은 뼈저리게 알고 있지만 말이다.


내가 첫 버스킹 장소로 선택한 곳은 루스타빌리였다. 이곳은 조지아의 과거 역사가 서려있는 장소로, 관광객이 많이 찾기에 상점가가 발달했고 어지러울 정도로 호객행위가 많다. 버스킹하는 사람도 많을 뿐더러, 자신의 그림을 파는 화가들이 한 데 모여있기도 한 곳이다.


즉, 비록 다른 목적으로 모여있긴 하지만 반경 50m에 어림잡아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수시로 몰려있는 곳이다. 나는 화가들이 호객을 하면서 열심히 오늘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첫 버스킹에 난이도가 너무 높다. 이 정도 군중이면…. 차라리 사람이 좀 빠지고 난 다음에 되돌아와서 실험삼아 연주를 해 보는 게 어떨까?’


그렇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거리에는 동양인이 정말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야 조지안들이 무척 너그러운 심성의 소유자라서, 설령 내가 연주하는 곡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 나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하니 겁이 난 상황이었다,. 자기 영역에서 연주한다고 와서 내쫓지는 않을까 하는 근거도 없는 두려움으로, 나는 몇 시간 뒤인 저녁 10시에 이곳을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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