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정상'인걸 증명해야만 합니다.

정신건강의 사각지대.. 치료 중심 접근법 한계에 놓인 사람들

by 해경글방

J는 이혼 가정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시기도 떠오르지 않는 과거의 일이다. 아버지는 J의 기억 속에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조그만 파편은 J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J는 아버지를 집에서 화만 내는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집이 더럽거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J에게 아버지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다.


J의 삶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해마다 이혼 가정의 수는 늘고 있다. 법원행정처 계산에 따르면 국내 이혼 가정의 비율은 9.3%에 달한다. 주위 10명 중 한 명은 이혼을 경험해 봤다는 의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복지 포럼에 실린 '가족변화에 따른 가족갈등양상과 정책과제'(김유경 연구위원)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32.5%는 최근 1년 이내에 가족 갈등을 경험했다. 어쩌면 이제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이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J는 자신을 '애매함'이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가정 환경이나, 외모나, 성격이다, 다양한 면면에서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애매하단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왠지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고. 주위에서 하도 성공에 대해 얘기해서 그런 거 같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애매한 것도 좋다. 정말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특출난 재능보다 적당히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가진 이 애매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J의 말처럼 애매함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치중립적 단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에서 다양한 애매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정신건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정신과 방문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혹은 그러한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양극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J도 자신을 정서적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경계선 지능인'이라는 말이 개념이 사회 문제로 주목받은 적 있다. 지적 장애는 아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데 어려운 지능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용어다. 이런 사람들은 복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경계선 정서인'도 마찬가지다. 정신질환으로 진단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에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의료 시스템상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뚜렷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에 주로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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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능의 정규분포 곡선


결국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려면 스스로 비정상임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단계에서 치료받기를 포기한다. 보건복지부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의하면 성인 4명 중 1명이 평생 한 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다. 그러나 정신장애가 있는 것으로 진단된 사람 중에서 평생 전문가(의사 등)에게 상담 치료를 받은 비율은 12.1%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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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결과 발표


항정신성 약물에 대한 처방 제한이 엄격하고 신원확인이나 처방을 위한 복잡한 절차도 많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부정적 사회 인식도 주된 원인이다. 최근 교사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드러나 이러한 시선은 더욱 매서워졌다. 마치 누군가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이 사회에 부적응하고 문제를 언제든지 일으킬 수 있는 위험군인 것처럼 여겨진다.


일상에서 느꼈던 정서 문제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두려웠어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공간에서 남들의 시선이 의식되면 금방 불안하고 떨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안 하려고 의식하면 할수록 강도는 더 심해졌어요. 내 행동이나 말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괜히 걱정하게 되고. 나중에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 괜찮았는지 계속 돌이켜 생각하다 잠을 설칠 때도 많았어요."


"저는 대학생이라 발표할 일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심하게 떨어서 발표하기가 힘들었어요. 발표 후에 땀이 나거나 떨려서 앉아 있기가 힘들 때도 있었고. 그래서 뒷사람이 나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혹은 땀 냄새가 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걱정의 굴레에 빠졌던 것 같아요."


J가 땀 냄새를 신경 쓰게 된 건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 체육 시간에 옷에서 냄새가 나 친구들이 범인을 찾았는데, 그게 본인이어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 이후 J는 강박적으로 본인 몸에서 나는 체취를 신경 쓰게 되었다.


냄새는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구별 짓기 기제라고 한다. 나와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냄새를 통해 구별하고, 배척하도록 인간은 진화해 왔다. 그렇기에 나와 다른 냄새를 풍기는 개체는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소외된다. 어쩌면 J가 가진 후각에 대한 예민함은,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대한 강한 두려움일지 모른다.


문제를 대처했던 방법


"병원에 가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 상담도 마찬가지고. 내 생각에 정신과는 땀을 비같이 흘리거나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서 집을 못 나가거나 그렇게 일상에 지장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괜히 의사가 왜 왔냐고 물어볼 것 같기도 했고."


병원에 갈 '정도'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1969년 로젠한의 실험은 정신 의학계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로젠한이 정신 병동에 7명의 가짜 환자를 보냈지만, 의사들이 이를 판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추후에 로젠한의 실험은 결정적인 증거가 조작되고 여러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 실험이 의학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정상/비정상의 경계는 무엇인가? 정신의학은 그 기준선을 명확히 그어낼 수 있는가? 로젠한의 실험 이후 정신 의학계는 DSM-3(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3판)을 개정하여, 진단에서 분명한 기준과 신뢰성을 보완하려 했다. 하지만 분명하고 과학적인 기준이란 결국 통계를 바탕으로 정해지는 것인데, 그렇기 그어진 경계선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도움의 바깥 편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


인터뷰 이후 J는 대학 무료 상담센터를 찾았다. 그러나 상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8주의 기본 상담을 진행한 후 J는 상담 연장 대상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가 비교적 남들보다 일상에 잘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의 손길은 J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만 향했다.


한국 사회의 정신질환에 대한 접근은, 병리학적 문제 개선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문제를 일으킬 아웃라이어에만 주목하며 그들의 행동을 억제하고 교정하는 것이 건강 정책의 주된 목표다. 정서적 문제를 겪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부족하다. 국내 정신건강 예산 대부분이 입원 치료와 약물 처방에 사용되며 예방적 상담이나 생활 복지 등에는 할당되는 비율은 미미하다.


정부에서는 지난 2023년 12월 국민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등 각종 정신건강 관련 지표에서 문제점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한 고립감 확산과 경제난 등 사회환경 변화로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위 정책에서 기존 우울증에만 머무르던 검사 질환을 조현병, 조울증 등으로 확대하고, 검진 주기도 기존 10년에서 2년으로 줄이는 등의 개선책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여전히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조기 발견과 치료가 핵심이며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병리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한 예방적 지원은 부족하다. 정신건강을 더욱 폭넓게 일상적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상담·예방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정신 건강,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영역


해외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2008년부터 IAPT(Improving Access to Psychological Therapies)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경증~중등도 정신건강 문제를 겪는 이들에게 심리치료 접근성을 높였다.


IAPT의 가장 큰 특징은 자가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GP(일차의료 의사)에게 의뢰받지 않아도, 심리적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IAPT 클리닉에 스스로 등록할 수 있다. 그리고 환자가 빠르게 상담·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대기 기간 단축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영국 내 우울증·불안장애 환자의 50%가량이 IAPT 이용 후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호전을 보였다는 통계가 있다. 중증 환자에 앞서 '가벼운 문제'를 조기에 해소하는 예방 효과가 커서, 장기적으로 의료비 부담 역시 줄였다.


호주는 국가 차원에서 학교, 지역사회, 직장 등 생활공간 전반에 '정신건강 문해력(MHL, Mental Health Literacy)' 교육을 체계적으로 도입했다. 일반 시민, 교사, 학생, 직장 상사 등이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지식과 대응법, 응급 대처법을 학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보급한다.


MindMatters는 중·고등학교 교직원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교육 프로그램으로, 스트레스 관리·정서적 지지·위기 대응 등을 다룬다. Mental Health First Aid (MHFA)라는 일반인에게 응급처치 개념으로 심리·정신적 위기에 대처하는 기술을 훈련하는 과정도 존재한다. 이를 이수하면, 주변인이 정신건강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제도의 핵심은 정신건강을 개인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관리해야 할 영역으로 보도록 인식을 바꿨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정상' '비정상'의 경계를 그으며 정신질환을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밀어내려고만 했다. 그러나 정신건강은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다. 이제 우리는 경계를 허물고 경계선에 선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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