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은 추상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모두 던져버렸다. 그의 <빨강·파랑·노랑의 구성>은 칸딘스키의 <노랑, 빨강, 파랑>에 비해 단순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수학적 균형미가 완벽하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빼면 안 될 것 같다. 그는 대상들 사이에서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찾으려 했다. 그러자면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 즉 색, 형태, 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깊이를 주는 요소도 당연히 배제했다. 그리고 만물을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로만 구성했다. 수직은 남성성, 수평은 여성성이며 나무는 수직선, 바다는 수평선 등으로 단순화했다. ‘단순한 것일수록 아름답다’는 그의 미학적 통찰은 20세기 미술과 건축, 그래픽 디자인, 패션 등 예술계 전반에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
색채는 빨강, 파랑, 노랑을 기본색으로 제한했다. 모든 색이 이 세 가지 색의 혼합으로부터 나온다는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초록과 곡선은 배제했고, 검은색은 그리드(grid, 격자 모양의 무늬)에 사용했다. 격자는 색채를 사각형 형태로 가두는 역할을, 그러나 격자가 없이 터진 부분은 외부로의 도약을 의미했다. 절대 순수와 수학적으로 엄격한 구성(컴포지션, composition)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추상은 현대 디자인 세계에서 큰 매력을 발산했다. 절제된 구도, 감정의 삭제, 치열한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칸딘스키보다 재현의 영역을 더 줄여나갔다. 그래서인지, 색채와 형태를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즉흥적인 감흥을 표현한 칸딘스키의 ‘따뜻한 추상’과 엄격하고 감정을 절제한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기하학적 추상주의)’으로 현대 추상을 구분하기도 한다. (제목 그림은 <구성 No.10(1939~1942)>)
회화의 목표는 아주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화폭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근법, 해부학, 명암법 등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회화는 “보이는 걸 다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볼 수 없었던 뭔가를 보여주는 것(파울 클레)”이 되었다. 서른이 되면서 몬드리안은 다양한 시도에 들어갔다. 자연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점묘법 등등. 그중 상징주의를 통해 형상의 기본 틀을 간소화하고, 1908년에는 마티스의 야수주의에 매료되어 순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했다. 1909년, 그는 신지학(神智學, 신의 본질과 행위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신비한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다는 철학·종교적 지혜) 협회에 가입하면서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탐색에 들어갔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 번째 ‘현대예술그룹’ 전시회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입체파 작품을 접했다. 이것이 그의 예술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기가 되었다. 결국,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둔 그해 11월 파리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듬해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추상미술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영적 본질과 물리적 외형을 결합, 이것이 그의 과제였다. 지극하면 통하는 법이다. 그만의 개성이 반영된 기하학적 주제가 정해지고, 1913년 첫 번째 추상 회화를 제작했다. <나무> 연작에서 입체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그의 추상이 발전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에서 나타난 작업 과정과 닮았다. 이후 30년간 추상은 그의 회화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네덜란드 추상화가들과 가장 순수한 형식, 스스로 ‘신조형주의’라고 부른 ‘데 스테일(네덜란드어 De Stijl, 스타일) 운동’을 시작했다. 수직의 인간이 수평의 풍경 속에서 직각을 발견했다. 입체주의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입체감을 파괴하려 애썼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조국이자 중립국이던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그는 1919년 여름 파리로 돌아왔다. 전후 피카소가 재현적인 회화로 되돌아간 사실에 실망했다. 추상의 분야에서 이룬 성취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의 외로움에 압도당했다. 1920년대 초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업실을 데 스테일 양식에 맞춰 개조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더 이상 미술과 장식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38년에 그는 처음으로 런던에 갔고, 전쟁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1940년 살고 있던 햄스테드에 폭탄이 떨어지자 미국으로 향했다. 그해 9월, 그리던 뉴욕 생활이 시작되었다. 최첨단 대도시의 역동성, 그리고 최신 재즈 음악 ‘부기우기’ 리듬, 이 둘은 몬드리안의 후기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연작 25점을 완성했다.
재즈는 당시 미국 음악을 진정으로 대표했다. 몬드리안은 그 리듬에 본능적으로 반응했으며 엄격했던 그의 추상에 리듬을 실었다. 검은색 격자가 밝은 노란색으로 바뀌었으며, 작은 삼원색의 면들이 리드미컬하다. 높은 곳에서 뉴욕 브로드웨이를 내려 보았을 때 감동이다. 질주하는 노란 택시, 브로드웨이의 네온사인, 흥겨운 재즈 음악을 형상화했다. 그림은 다시 직사각형을 눕혀 그렸다. 이 마름모 형태의 구성은 파리 시대의 정점을 찍었으나 <빅토리 부기우기(1943~1944)>, 승리의 'V'자라는 상징성하고도 연동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원한 듯하다. 빠른 리듬에 맞춰 점멸하듯 춤추는 빨강, 파랑, 노랑의 가는 색면은 확산되는 효과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작품은 미완성 유작이이다. 뉴욕에 정착한 4년 차인 1944년, 72세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미국 현대 회화는 잭슨 폴록이 이끌었다. 몬드리안이 1942년에 발굴한 인물이다. 몬드리안의 화상이었던 페기 구겐하임이 그의 작품을 보고 혼란스러워할 때 ‘자신이 보아온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라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수잔네 다이허, <피트 몬드리안>) 덕분에 무명 작가였던 폴록은 미국의 새로운 양식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는 동력을 확보했다. 그렇다. 역사의 진보는 혼자 힘으로만 완성하지 못한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몬드리안에게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