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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22. 2023

대가들이 보여 주는 우정과 논쟁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접목하는 농부>

프랑스의 도시를 사실적으로 서술한 화가가 도미에와 쿠르베라면,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화가들의 무리가 바르종파다. 대한민국에서는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가 구심점이 되어 자연주의 화풍을 선도했고, 밀레는 가장 뒤늦게 합류했다. 

당시 그는 몹시 곤궁했다. 아내와 아홉 명의 아이플 먹여 살려야 했고, 두 동생도 화가가 되겠다며 바르비종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미술전에 <접목하는 농부>를 출품했고, 현장에서 최고 가격인 3,000프랑에 팔렸다. 그는 컬렉터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었지만,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사업가였기에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루소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침실에 걸린 자기 작품을 목격했다. 말없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준 친구의 진심 어린 도움에 감동했다.


이번엔 루소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내의 정신 건강이 악화하였고, 부친까지 그에게 의존했다. 풍경화에 천착한 탓인지 후원자가 없어 1861년 경매가 실패로 끝났다. 설상가상으로 1863년 스케치를 위해 몽블랑을 찾았을 때 폐렴이 발생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점점 쇠약해진 루소는 몸이 마비된 가운데 밀레가 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루소 사후 밀레는 친구의 병든 아내 등 가족을 끝까지 돌보았다. 밀레의 유언에 따라 두 사람은 바르비종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그리고 산책을 즐기던 퐁텐블로 숲길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앙리 카푸(Henri Chapu)의 부조(대문 사진)가 바위에 새겨졌다. 돈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격이 부여된다.



양자 이론은 한 천재의 통찰력이 아니라, 많은 과학자의 고민이 축적되면서 체계화되었다. 그만큼 복잡하고, 이전의 개념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당연히 학자 간 입장이 찬반으로 나뉘어 치열한 토론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심에는 현대 물리학의 대가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가 편을 나누어 버티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52년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사양할 정도로 인격과 절제력이 검증된 인물이다. 

보어는 조용하면서 매우 사려 깊었다. 1921년 영국의 프레더릭 소디(Frederick Soddy, 1877~1956)에게 노벨 화학상을 빼앗긴 적이 있다. 스승인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변위법칙과 관련한 자기 아이디어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절 내색하지 않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평생 유지했다. 이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러더퍼드의 축전을 받자 12년간 보여준 그의 우정에 깊이 감사하며 진심으로 반겼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1920년 4월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다. 보어가 양자 원자와 원자 스펙트럼 이론에 대해서 강연해 달라는 막스 플랑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보어는 흥분과 우려 속에서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인사를 마치자 곧바로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근처 달렘에 있는 플랑크의 집에 묵은 보어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로 식량 부족이 심각했으며, 반유대주의가 극심하여 학생들이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집단으로 중단시켰을 때였다. 마침 파업으로 전차가 다니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약 15km 거리를 걸어가서 보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럼, 한 끼 식사를 위해 왕복 30km를 걸었다는 뜻이다. 헤어진 후 아인슈타인이 보어에게 편지를 썼다.


“살아오면서 당신처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보어는 깜짝 놀랐다. 여섯 살 어린 그는 존재감에 있어서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 아인슈타인과 비교될 처지가 아니었다. 보어는 어설픈 독일어로 “당신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내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 달렘에서 당신 집까지 걸으며 나눈 대화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답장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해 8월과 1923년 노벨상 수상 강연을 마치고 일부러 코펜하겐을 방문하여 보어와 재회했다.

아인슈타인의 '빛상자'

하지만 학문적 토론에서는 서로 양보가 없었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솔베이 학회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당시 아인슈타인이 아침에 부정적인 질문을 던지면, 보어가 저녁에 답을 제시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런 경계심은 베른의 특허사무소에서 일할 때 밴 습성 때문일 수 있다. 소장인 프리드리히 할러는 “신청서를 집어 들 때는 발명자가 주장하는 모든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발명자의 사고방식에 빠져들어 편견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만지트 쿠마르, <양자혁명>) 

보어도 아인슈타인의 광자 가설을 극도로 싫어했다. 1923년 콤프턴 산란 실험을 통해 광자의 실체가 인정되었음에도 이를 모른 채 거부했다. 훗날 카를로 로벨리가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실제로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보어 역시 사정이 처음 생각한 것만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고. 이후 보어의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아인슈타인은 직접 완벽한 이론을 찾는데 마지막 25년을 쏟아붓는다. 통일장 이론이다. 그러나 진전이 없었고, 세상은 양자역학이 학문적 대세를 이루었다. 쓸쓸해진 그는 1955년 76번째이자 마지막 생일을 지낸 후 보어에게 편지를 썼다. 비핵화를 요구하는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의 비핵화 선언에 동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지 말아요. 이것은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오랜 논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우리가 완전히 동의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보어도 아인슈타인의 도전이 의미심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보어는 물리학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늘 염두에 두었다. 보어는 1962년 치명적인 심장 발작으로 죽기 하루 전날 밤, 서재 칠판에 그림 하나를 그려 놓았다. 1930년에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 ‘빛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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