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인영 Mar 11. 2024

탱고처럼 흔들리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인상

아르헨티나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키워드가 떠오를까? 대한민국의 많은 이는 '축구'를 제일 먼저 꺼낼 듯하다. 세계적인 스타 마라도나와 메시를 배출했고, 월드컵에서 멋진 경기를 우리에게 선물했으니까. 내겐 '탱고'가 제일 강렬하게 다가온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명대사와 이따금 그 말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했기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눈먼 퇴역군인 프랭크 슬레이드(알파치노 분)가 처음 만난 도나(가브리엘 앤워 분)에게 탱고를 추자고 제안한다. 탱고를 춰본 적이 없는 그녀는 실수가 두렵다. 그러자 프랭크가 망설이는 도나에게 말한다.


"스텝이 엉키면 어때요. 그것이 탱고예요."


프랭크의 리드에 따라 도나는 탱고를 멋지게 한판 즐기게 된다. 아! 삶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때의 감동은 영화가 아니라, 탱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살펴본 아르헨티나 정치, 경제의 스텝은 엉켜도 너무 오래 엉켜 있다. 그래서 이젠 그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혀 국민들이 무감각해졌다는 것이 문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벨리스크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 전 기내에서 한차례 소동을 겪었다. 강한 난기류로 인해 기체가 크게 흔들려 탑승객들이 몇 차례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싱가포르에서 남인도 트리바난타푸람(트리반드룸)을 들어갈 때보다 심했다. ‘탱고의 나라’여서일까? 어째 처음부터 스텝이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내가 내가 풀 수 있는 일은 없다. 생사를 하늘에 맡기고 평온을 가장할 수밖에.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에 큰 서사가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숨 쉬고, 안 쉬는 차이일 뿐이다.


수하물 창구에서 대기. 일부 인원은 아예 멈춰 선 화물 벨트에 앉았다

다행히 우리는 땅에 안착했다. 비행기는 뜨고 내리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고 한다. 하지만 착륙할 때 급제동에 의해 기체가 덜컹거리며 바퀴가 땅에 닿는 거친 감각이 매우 반가웠다. 예전 가을과 겨울 사이 설악산 대청봉 하산길에 밤길을 잃은 적이 있다. 준비가 부족했기에 침낭과 함께 긁어모은 마른 낙엽을 덮고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새벽, 굳은 몸을 일으켜 개울의 살얼음을 깨고 찬물로 입안을 헹궜다. 그때 맡았던 치약 냄새가 이와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공항에서 짐을 찾으면서 재발했다. 무려 3시간이나 공항에 붙잡혀 꼼짝 못 했다. 오전 탑승객 짐부터 계속 밀려 있었다. 더욱 황당한 일은 공항 측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사과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노조에서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 밀레이를 겨냥한 경고성 세 과시”로 받아들인다. 어쨌든 목소리를 높여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빙하 체험부터 트래킹까지 이곳 사계절 체험 프로그램이 과연 제대로 작동할까?"라는 근심이 앞섰다.


오월 광장 풍경

여행 전 대한민국 정규 방송과 유튜브에서 아르헨티나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소식을 거듭 전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6번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달러 대비 페소의 환율이 1:1.3이던 것이 2022년 1:170, 2023년 오늘(12월 1일) 1:920을 찍었다. 60전이던 버스 차비가 600페소로 치솟았다.

우리 일행의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 입장료가 상징적이다

밀레이 당선자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중앙은행을 폐지와 페소를 달러에 연동한다는 충격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희망의 불씨가 꺼진 유권자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밀레이를 대안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8월, 1차 예선에서 밀레이가 56%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환율이 다시 1:530에서 1:830, 그리고 지난 10월, 1:1,150까지 치솟았다. 그래서 요즘 이곳에서는 “오늘 사는 것이 내일 사는 것보다 싸다”란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는 ‘백인의 국가’를 자처한다. 이곳을 지배했던 스페인조차 수백 년 이슬람 통치를 받으면서 이미 혼혈이 두드러진다. 하물며 한 다리 건너 남미 땅에서 ‘백인’이라는 개념은 불필요하지 않을까? 굴러온 돌들이 드러내는 인종 차별주의적 발상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제삼자 입장에서 논쟁을 이어갈 생각은 없다. 이 역시 무의미하긴 마찬가지다.


'봄의 전령' 히까란다(Jacaranda)

아르헨티나의 국토는 인도 다음으로 세계 8위 규모로, 브라질 못지않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서쪽과 남쪽에 비옥한 대평원 팜파스가 있다. 쇠고기와 양모, 그리고 밀과 옥수수가 풍부하게 생산되기에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다.


오월 광장 주변 거리 모습. 마치 유럽 어느 도시에 온 듯하다

아르헨티나는 1900년대 무렵에는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국가였다. 하지만 세계 4~5대 경제력을 자랑하던 경제가 불가사의하게 몰락했다. 그래서 노벨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가 세계 경제를 ‘선진국과 후진국, 일본, 아르헨티나’로 나눴다. 일종의 비아냥이다.

 

금세 오던 비가 멈춘 거리 풍경 비교

경제 실책과 관련한 원인은 둘로 나뉜다. 첫 번째, 페론주의다. 1943년 쿠데타에 참여했던 페론이 3년 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외국 자본과 기업을 국유화하면서 최초로 사회 복지에 관심을 두었다. 이를 ‘포퓰리즘’으로 규정,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 정책이 파국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반면 페론주의자들은 1976년 쿠데타로 이사벨 페론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의 무분별한 외자 유치와 수입대체 산업의 실패를 지적한다. 군사 정권은 1982년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하면서 이듬해 민정 이양이 이루어졌었다 글쎄, 둘 다 아닐까?


'엘 아테네오 서점', 책 보는 모습은 누구라도 아름답다

예약했던 점심 식사를 취소하고, 숙소로 가는 버스에서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랬다. 짐을 풀고 먼저 ‘엘 아테네오‘ 서점을 찾았다.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서점은 진(眞)과 미(美)를 결합했다. 책은 곁에만 두어도 영혼을 정화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서점이다. 여행 프로그램으로써 서점이 매우 참신하다고 여겼다. 

 

'흰 스카프를 두른 어머니' 상징 조형물

이어 ‘5월 광장’을 찾았다. 1810년 5월 25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기념한다. 이후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특히 독재정권 시절 사라진 가족에 관한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흰 스카프를 두른 어머니 집회’는 지금도 여전히 열린다고 한다.


대통령 궁 '까사 로사다'

오월 광장을 끼고 대통령 궁 ‘까사 로사다’(분홍의 집)가 보인다. 원래는 요새로 쓰였는데, 분홍색 페인트칠을 해서 이름이 그리 붙여졌다. 그런데 건물 현관으로부터 좌우 길이가 균형에 어긋난다. 오른편을 전철역에 할애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오히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통치자와 국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다. 창덕궁 어수문(魚水門)의 이름이 그런 의미다. 이곳 정치인도 이 점을 인식하고 정치를 하면, 국민의 사랑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광장 내 모든 구조물이 더욱 근사하게 보이는 것은 보라색 '봄의 전령' 하까란다(자까란다)를 곁에 두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중심가 솔 광장의 사랑나무가 저절로 떠오른다. 유다가 목을 매달았다는 처연한 아름다움의 그 사랑나무.


의사당과 대성당(왼편 사진). 오른편 멀리 중앙에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의사당과 예수의 제자 수에 맞춰 12개 기둥을 세운 대성당 사이의 도로 끝에 시선을 준다. 1946년 도시 400주년을 기념한 오벨리스크가 온전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7월 9일 거리’ 한가운데 67m 높이로 세웠다. 폭 144m, 20차선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거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의 어느 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운 도시다. 그러나 남미의 도시로서는 독창성이 없다. 결국, 아르헨티나가 백인 국가를 표방하는 태도와 연결되며, 지배층의 향수를 달래주는 도시 설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극장 내외부 모습. 활짝 펼친 악기 반도네온과 LP 레코드판이 곧 전통을 상징한다
공연 전 모자를 쓰고 무대 소도구를 갖춘 손님들의 사진 촬영

마지막 탱고 감상이 비행장에서 쌓인 피곤과 짜증을 말끔하게 씻어 주었다. 앞서 언급한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춤과 음악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바로 그 탱고다. 처음에는 세비야의 대형 플라밍고 극장과 연결 지어 공연장을 상상했다. 하지만 상업성이 풍기지 않는 소규모 전통 극장으로, 이 역시 마음에 들었다. 

 

먼저 나온 두껍고 맛난 스테이크를 충분히 즐길 즈음 관록이 물씬 풍기는 전문 연주자 네 명이 무대에 올랐다. 각자 양피지 두루마리처럼 긴 악보를 펼쳐놓고 악기를 조율한다. 아코디언의 원조 반도네온 연주자를 중심으로, 왼편에 첼로와 피아노, 오른편에 기타 연주자로 구성되었다.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로 불린다.


이윽고 남녀 댄서가 쌍을 이루어 탱고를 춘다. 어떤 때는 한 쌍, 어떤 때는 세 쌍이 등장했다. 이들은 손을 잡고 리듬에 맞춰 서로 상대방의 눈을 마주쳤다가 돌렸다가, 몸을 밀착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여인이 자칫 쓰러질 듯하면, 사내가 받쳐주며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의 시선을 교환한다. 

템포가 빨라진다.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든 여인의 오른발이 갑자기 반동을 주며 위로 구부린다. 그리고 절정에서 발목을 좌우로 굽히던 남성 댄서가 급기야 점프하는 여인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린다. 매우 탄력적이다. 한마디로 끈적끈적하다. 


여인이 발을 깡총 든 채 사내에게 몸을 의지한다 

하지만 나는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이는 늙은 남녀 댄서에 집중했다. 피에로처럼 짙게 화장한 여인의 표정이 우울하다. 쓸쓸했던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풍긴다. 압권은 상대 남성 댄서다. 머리를 짧게 자른 그의 눈과 몸짓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아직 나 죽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흠뻑 빠져들어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이전 05화 ‘이구아수 폭포’ 3D 체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