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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ug 13. 2021

"Chanel No. 5 (1/7)"

결혼을 생각했던 한 사람과의 추억

소중한 사람과의 이메일이나 그 사람과 같이 갔던 곳에서 받은 영수증 따위를 보관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1991년 때부터 있던 습관이지요. 작은 박스 안에 모아놓은 것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습관은 세상이 온전히 Internet generation으로 바뀐 2000년대 중반 이후에도 계속되어, 이메일 박스에 별도로 folder를 만들어서 의미 있는 이메일이나 사진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더위가 살짝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한 오늘 저녁,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어 수년간을 통해 정리해놓은 이메일을 읽다 보니 아영씨에게 보낸 편지들이 보이더군요. 수십 장은 되는 양으로,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시간을 통해 쌓인 편지들입니다. 그중 2013년에 보낸 이메일이 특별히 눈에 띄었고, 방금 다시 읽어보니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의 내용이었더군요. 하지만 아영씨와 내가 처음 알게 된 2003년, 그리고 그 후 몇 년간 있었던 일들, 적지 않은 시간 동안의 이별 후 다시 만나게 된 2013년, 그리고 잠시 멀어졌다가 또다시 만나게 된 2020년 - 이런 우리 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이런 내용의 편지는 사실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우린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이였으니까.




오늘 처음 가 본 "La Spara"는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아영씨. 혹시 변덕스러운 날씨에 바깥공기가 너무 차갑지 않았나 걱정이 됩니다. 평상시의 체온이 37.5도인 나도 머리가 조금 아팠는데, 체온이 정상보다 1도가 낮은 당신이 혹시 두통이나 생기지나 않았을까 해요. 그리고 점심을 했던 장소 - 사당동 떡볶이 골목시장의 그곳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아까 말했던 대로, 예전에 미국에서 있을 때, 가끔 보던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편의점에서 늦은 밤에 라면을 먹는 모습, 또는 백열등이 달린 주점이나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주연배우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꽤나 로맨틱하게 보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 와서 약간은 설레는 기대를 가지고 직접 경험해 보았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비참한 기분이 들었어요. 오늘 간 곳은 그렇지는 않았지만, 반/반이지만 한국 거주/미국 거주 12년째인 저에게도 아직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2001년 때 그때 말해준 그 사람과도 이런저런 곳을 많이 다녔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갔었던 곳마다 새로웠고, 생소하고, 신기하고, 재미있었지요. 그런 기분을 오늘 당신과 갔었던 두 곳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나를 대할 때 간혹 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마 과거와 현재 간의 혼선이 약간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물론, 즐겁고 황홀한 느낌들입니다.    


당신은 내가 "사랑한다" 또는 "사랑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세명이나?"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시길. 물론 지금은 사랑의 성격이 절대로 예전과는 같을 수 없겠지만, 아영씨 - 당신은 내 사랑 중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고 지낸지는 10년이 넘지만, 사실 같이 지낸 순간들은 길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우리 사이에 약간의 사건도 있었기에, 우린 역시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시 만났고, 아마도 다시 가까이 지낼 수 있고, 만나면 서로가 반갑고 기쁘니, 기적 같아요. 물론, 당신의 넉넉한 마음과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결과이겠지요. 


사실, 아까 서울역 근처로 바래다줄 때, 당신의 머리카락에 실오라기가 있었어요. 그걸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약간은 어색하게 그것을 떼어냈을 때, 혹시 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러운 걱정도 해 봅니다. 그만큼 아직은 내가 기억하는 7년 전의 당신과 지금 현재의 당신 사이의 단 한 가지의 차이점 때문이라 생각해요. 


우리, 5월 14일 화요일이나 5월 16일 목요일에 만날까요? 




2013년 4월, 봄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 아영씨는 답장도 문자도 없었지요. 아무래도 이렇게 마무리되는 우리인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살짝 흥분했던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있던 어느 날 늦은 밤, 아영씨로부터 이런 Facebook message 가 왔습니다:



11:33pm May 9

오늘 회식았어요
취함
피곤
쉬고싶어요
......쉬고시ㅠ어


11:34pm May 9

빠^^~~~


저는 이 메시지를 그 다음날 오전 일찍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잔잔해지던 마음속에 다시 아영씨는 작은 파문을 이렇게 일으키더군요. 푸르름이 유달리 짙었던 5월 10일의 서울이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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