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mi Jun 19. 2016

"뉴욕, 첫 키스 (final)"

작별

병원은 어두웠습니다. 미국의 병원은 한국의 병원과는 달리, 보호자도 면회시간이 아니면 환자와 같이 있을 수도 없으며, 병원 내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간혹 있으나, 위중한 환자의 경우에만 가족이 곁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이렇기에 ER을 제외한 병원은 적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정문에도 인기척 하나 없던 그 가을의 그 시간... 차를 주차한 후 병원 메인 데스크에 문의를 하여 보았습니다... 오랜 친구라고, 암 환자라고 들었다고, 5분만 만날 수 없냐고... 답은 물론 "No" 였지요. 다음 날이 있지 않으냐며, 환자의 안정이 우선이라는 당연한 답을 들었지만, 참 아쉽더군요. 오전 8시에 오면 들어갈 수 있다는 직원의 말을 뒤로하고 병원 밖으로 걸어나왔습니다.


물론 Holly 가 내일 세상을 떠나지는 않겠지, 그리고 내일 아니 주말에 올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은 그때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묘안은 "사무실에서 밤을 보낸 후, 출근시간 전에 다시 오자, 그렇게 하면 집에 다녀오는 시간은 절약할 수 있겠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에서 나와 차를 더 남쪽으로 항해 달렸습니다. 사무실로. 맨해튼은 결코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말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 시간에, 자정이 넘어간 시간에 아시아 시장에서의 거래를 위해 트레이더들이 꽤 많이 출근하여 있다는 사실은 처음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위치한 35층을 지나 48층의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남쪽을 바라보는 창문, 자유의 여신상을 비추어주는 조명과 그 주변을 천천히 지나가는 몇 대의 배들과 페리들이 그 더디게 지나가는 시간만큼이나 불을 껌벅이며 남으로, 북으로, 서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각각 향하고 있었습니다. 1010 WINS (AM radio 뉴스 방송)를 들으며 깜박거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별다른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밀린 일을 하다, 그리고 물 한잔을 마시다가, 그리고 빌딩 1층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를 두세 번 반복하니 새벽이 되더군요. 5시가 넘어 빌딩을 나선 후 근처 Bagle 가게를 갔습니다. raisin bagel 하나, 그리고 cofee with no sugar... 아니, 그날은 sugar를 두 개 받았습니다. 설탕이 필요한 아침일 듯했지요. 그리고 차를 타고 다시 NYU Hospital로 향했습니다.


꽃을 사 갈까 하여 근처에 있던 한인 Deli grocery 에 들렀습니다. 장미 한 다발을 샀습니다. 바로 준비한 꽃들이라 그런지, 이슬 같은 물방울들이 아롱아롱 맺혀 있었습니다. 이 물방울들이 병원에 도착하여 병실에 이를 때까지 그대로 있어줄까? 하는 생각에 운전도 조심스럽게 했지만 결국 그렇게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싱싱한 장미 한 다발을 들고 Holly 가 있다는 층에 도착했습니다. 둔탁한 엘리베이터 벨 소리와 함께 문은 열렸고, 그녀의 병실 호수를 찾아 걸어갔습니다. 문 밖에 표시된 숫자를 확인한 후, 노란 전구색 불빛이 새어 나오는 병실 안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침대엔 하얀 시트를 덮고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백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많이 마른 모습이라는 것을 그녀가 덮고 있던 시트의 모양새로도 알 수 있었지만, 그 금발머리를 보니 그녀임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Holly?"


"Wow... look who's here... I can't believe what I am seeing now!"


"You look still stunning, Holly! What are you... taking a break from the world or what?"


하며 농담을 건넸습니다. Holly 도 웃으며 화답하더군요:


"Yeah, yeah, I think you can say that. How many years ago was it? Gosh, nearly 10 years, and you haven't changed a bit!"


"Thank you, and you look exactly the same, too."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실, 그녀의 얼굴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깊이 들어간 두 뺨, 그리고 그 멋진 금발도 생기를 많이 잃은 듯해 보였으며, 입술 또한 많이 말라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갈색 눈동자는 아직 초롱초롱한 숲 속 별빛 같았지만, 두 눈동자 아래는 이미 검은빛의 색이 지나치도록 많이 번져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않기도 하고, 서서 있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1시간... 8시에 아침식사가 들어오더군요. 그녀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출근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떠날 수는 없었지요. 올라오기 전엔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었지만, 예상보다는 나빠보이지 않던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는지, 슬픈 기색도 하지 않고 거의 1시간 반이 넘도록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고, 다음번에 올 땐 다운타운에서 맛난 음식을 사 오겠다고... 그런데 그녀는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듣고만 있던 Holly는 이렇게 우리의 작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The doctor says that I may have less than a month to go, and I didn't tell this to anyone yet."


그래도 한 달 안에 또 볼 수 있잖아?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지요. 그 후 몇 가지 더 해준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들... 그녀는 제게 부탁 하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며칠은 부모님의 집에 가 있을 거라고, 내일 병원에서 퇴원을 하게 되어 있다고, 그래서 내가 오늘 와 준 일이 신이 도우신 일이라고,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는 말을, 제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말을 해 주는 동안 미처 그녀를 바라볼 수 없어서 창문 밖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저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작별 인사를, 그때 그녀는 제게 그 순간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Holly에게 그 날 그 순간 멋진 말들을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좋은 말들이 있었을 텐데 - 하는 후회도 있습니다. 가을 햇살이 참 따스하게 내리던 그 날 오전, 저는 그녀가 8년 전 제게 해 준 그대로 그녀의 오른쪽 뺨에 키스를 해 주었습니다. 같은 떨림, 같은 주저함, 그리고 그녀의 향기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녀는 환하게 웃어주었고, 저도 그녀에게 웃어 주었습니다. 병실을 어떻게 걸어나와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등을 돌리고 나오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슨 이야기를 그냥 캐주얼하게 하며, 한 손으로는 인사하듯이 흔들며, 그리고 병실 문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바로 전엔 마치 군인이 경례를 하듯이, 하지만 그 딱딱한 경례가 아닌 듯 그 끝을 손가락으로 하늘에 무언가를 흩날려버리는 듯이 그녀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본 그녀의 활짝 웃는 그 미소와 그 눈빛 - 8년 전의 그 미소와 눈빛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그 미소와 눈빛 - 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마치 영화 한 장면의 스틸 컷처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35세도 되지 않은 그녀는 그 후 한 달이 지나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6년 11월이었지요. 16살의 어린 제게 제게 첫 키스를 준 사람, 그리고 제가 늦었다면 늦은 첫 키스를 준 상대인 Holly Stoller... 뉴욕에 갈 때마다 Lexington Avenue 그 거리를 한 번은 지나갑니다. 그 날이 겨울이거나 가을이라면 마음이 괜히 설렙니다. 마치 그때처럼, 다음 블럭 코너에서 혹시 단발의 금발머리 여성이 저를 보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어주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나마 할 수 있기에... 그리고 저는 차를 세우겠지요... 그녀가 차에 올라타면 저는 아마도 Simon and Garfunkel 의 "Kathy's Song" 을 틀어줄 듯 합니다.


"My mind's distracted and diffused
 My thoughts are many miles away
 They lie with you when you're asleep
 And kiss you when you start your day.

And so you see I have come to doubt
 All that I once held as true
 I stand alone without beliefs
 The only truth I know is you."


- 끝 -

이전 04화 "뉴욕, 첫 키스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