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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Sep 27. 2024

2. 메타세쿼이아와의 인연

<양재천 산책>

  

내가 양재천 가까이에 살게 된 계기는 어쩌면 메타세쿼이아 나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 나무는 나의 살 곳을 정해준 소중한 벗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해외에 근무하던 남편이 귀국하면서 고등학교 2학년 생이던 아들이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서울살이를 위해(나는 지방에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다) 서울에 집 한 칸을 마련해야 했던 나는 다른 엄마들의 조언을 귀담아듣다가 결국 아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강남으로 오게 되었다. 해외에 오래 근무하다 한국에 돌아오면 비싼 집값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특히 비싼 집값의 대명사인 대치동에서 집을 구하려고 돌아다녔으니 나는 너무 물정이 없었던 셈이었다. 


서울에 전셋집 하나를 구하러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닐 때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 박완서 작가가 쓴 <엄마의 말뚝>이라는 작품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상경해 식구들이 몸을 누일 공간 하나를 마련하려고 처절하게 애쓰는 이야기였다. 나는 <엄마의 말뚝>을 생각하며 서울에 말뚝 하나를 박아야겠다는 불타는 의지로 강남의 여러 아파트로 발품을 팔고 다녔다.     

 

부동산 아주머니를 따라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 집 거실 바로 앞에 메타세쿼이아 나무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거실 창으로 다가갔다. 아름드리 실한 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올라 거실 창문을 반 너머 가리고 있었다. 나무의 잎 모양이 마치 연두색 고사리 같았다. 나는 내가 왜 그 자리에 있는지도 잊은 채 나무를 바라보았다. 강남의 아파트촌에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창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풍경이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그 아파트 단지 내에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키가 거의 아파트 10층까지 이르고 있었다. 


비싼 전셋값에 계약을 망설였지만, 그날 밤 자리에 누웠어도 메타세쿼이아의 고사리 같은 손이 나타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나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 날 그 아파트로 계약하고 말았다.      

집을 방문한 친구들이 나무 때문에 집안이 어두워 보인다고 염려했지만, 나는 나무로 인해 행복했다. 통유리로 된 거실 창을 깨끗이 닦고 그 앞에 스툴을 놓은 후 거기에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셨다.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들은 보통 햇볕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마련인데, 이 나무는 똑바로 하늘로 솟아올랐고 가지를 사방으로 고루 뻗어 균형된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득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간들과는 달리 고고함을 자랑하는 듯한 그 자태가 너무 좋았다. 줄기는 우람하고 잎은 연한 고사리 같은 이 나무가 지조도 으뜸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내가 아침에 커튼을 열면 창문 앞에 기다리고 섰던 나무가 제일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푸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짝 흔들리면 나무가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2년여간, 창문 앞의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바라보며 메타세쿼이아와 친구가 되어 갔다. 나무와의 교류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경험은 가을이 되자 나뭇잎이 붉게 물들더니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가지째 뚝뚝 떨어졌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낙엽수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낙엽이 지고 나무가 나목이 되자 괜히 슬펐다.   

그러던 겨울 어느 날, 메타세쿼이아의 가지 끝에 둥근 무엇인가가 달려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가지 끝마다 움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 둥근 것이 펼쳐지면서 새로운 나뭇잎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묵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순간 나무는 새잎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메타세쿼이아뿐만 아니라 목련, 은행, 벚꽃 등 식물 대부분이 나뭇잎을 떨구자마자 새 움을 틔우고 있었다. ‘묵은 잎을 떨어내고서야 새 생명을 준비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나무는 내게 주었다. 나무가 주는 교훈이 좋았다. 

봄이 되자 가지 끝에 주렁주렁 꽃이 피었다. 수꽃은 길게 아래로 늘어지고 암꽃은 위로 솟아올랐다. 늘어진 수꽃이 바람을 타고 꽃가루를 뿌리자, 암꽃이 이를 받아 둥근 열매를 맺었다. 나는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은밀한 사랑을 들여다보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데 우리 거실 앞 메타세쿼이아와의 행복한 교류가 끝날 날이 왔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늘 창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내 친구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나무가 밑동만 남고 싹둑 잘려있었다. 누군가 나무로 인해 집이 어둡다고 불만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실망하고 분노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이사를 하였다. 메타세쿼이아가 사라진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 후 양재천의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볼 때마다 우리 집 거실에서 나와 교류를 나누던 그 나무가 생각난다. 메타세쿼이아의 꽃말은 ‘영원한 친구’이다. 


                             강남 아파트의 메타세쿼이아 나무: 성인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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