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어느 봄날, 양재천을 걷다가 하얀 꽃이 구름처럼 덮여 있는 키 큰 나무가 눈에 띄길래 유심히 올려다보았더니 바로 귀룽나무였다. 나는 나무 주변을 요리조리 돌다가 나뭇잎을 떼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귀룽나무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났다. 틀림없는 귀룽나무였다.
나는 양재천변에서 귀룽나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깊은 계곡에서 자라는 귀룽나무가 어찌 이곳에서 자라고 있었단 말인가.
양재천에서 귀룽나무를 만나자 지금까지 귀룽나무와 조우한 여러 장소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귀룽나무의 포도송이처럼 피어나는 흰꽃과 코 끝에 스치는 강한 향기도 떠올랐다. 그만치 귀룽나무는 내 기억 속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는 나무였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도 봄이었던가 보았다. 홍살문을 지나고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정자각 옆에 서 있는 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연녹색 무성한 잎 사이로 흰 꽃이 뭉게구름처럼 무리 지어 나무를 뒤덮고 있었다. 바닥에도 온통 흰 꽃이 떨어져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았다. 벌이 윙윙거리고 산들바람에 꽃가지가 흔들리며 말할 수 없는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왔다. 처음 보는 나무였다. 그 나무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던 나는 관리인에게 뛰어가 나무 이름을 물었다. 그것이 나와 귀룽나무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 귀룽나무는 줄기 껍질이 거북의 등처럼 갈라지고, 줄기와 가지가 용틀임하는 것 같아서 구룡(龜龍) 나무라 불리다 귀룽나무로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초봄에 흰 꽃을 피우는데 구름을 연상케 할 정도로 꽃이 무성하게 나무를 덮어 북한에서는 ‘구름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전국의 산골짜기에서 이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여기서 ‘알고 보니’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역시 아는 만치 보이는 법이다. 그전에도 산야 어디에선가 이 나무를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여주에서의 귀룽나무와의 조우 이후 이제 나는 멀리서도 귀룽나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귀룽나무의 꽃말은 ‘사색, 상념’이라고 한다. 장미과의 이 화려한 꽃무더기에 왜 이런 심각한 꽃말이 붙었을까 잠시 의아해졌다. 그런데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 앞 계곡을 장식하고 있는 귀룽나무들을 생각하자 그곳이야말로 이 꽃말이 꼭 들어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왕조의 궁중 역사에서 가장 애달픈 이름의 하나가 된 비운의 왕 단종. 이 비운의 왕이 유폐된 곳이 서강이 둘러싸고 흐르는 청령포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소나무 숲이 아름답게 남아 당시의 슬픈 사연을 전해주는 것 같다. 삼촌이 언제 자기를 죽이려고 할지 몰라 늘 벌벌 떨며 살았다는 단종의 어소 앞에는 키 큰 소나무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다. 어떤 소나무들은 어린 단종을 지키기라도 할 듯 어소 앞으로 팔을 길게 드리우고 있어 후세사람들에게 단종애사를 더 슬프게 만든다. 이곳에서 600년을 살아있는 한 노송은 단종의 두려움에 떨던 흐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수양대군은 조카를 사사했고 겨울 서강에 던져 넣어진 시신은 세조의 서슬 퍼런 권세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건져낼 엄두도 못 내고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언 강물에 둥둥 떠 있는 왕의 시신을 바라보며 영월 민초들의 가슴은 얼마나 비분강개했을까. 결국 호장(戶長 : 지금의 읍장)인 엄흥도가 나섰다. 도저히 왕의 시신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밤에 몰래 왕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 단종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가서 가매장하였다고 한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그날로 영월을 떠나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단종의 무덤이 있는 이 계곡에 유난히 귀룽나무가 많았다. 5월에 이곳을 방문하면 키 큰 귀룽나무가 여기저기서 구름 같은 흰 꽃을 피워 마치 단종의 원혼을 애도하기라도 하는 듯 보인다.
단종의 무덤이 있는 언덕에 서서 은은히 풍겨오는 귀룽나무의 꽃향기를 맡으면 ‘사색, 상념’이라는 꽃말이 가슴에 쏙 와 박힌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조카의 목숨까지 빼앗았던 세조와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죽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지킨 엄흥도를 비교하면서 이곳의 귀룽나무는 우리들에게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색 상념해보라고 권하는 것도 같다.
세종능에 심어진 귀룽나무와 단종능의 계곡에 풍부한 귀룽나무가 묘하게 이들의 슬픈 인연을 이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 후 여러 곳에서 귀룽나무를 만났다. 귀룽나무는 물을 좋아해 계곡에서 잘 자라는데 깊은 계곡이라야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듯하였다. 검은 줄기가 용틀임하는 듯 뻗고 구름같이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춘천에 있는 제이드가든의 숨은 보물도 계곡 옆에 자생하는 귀룽나무라고 생각한다. 서울 강남의 대모산 자락 깊은 골짜기에서도 고목이 된 귀룽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귀룽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이 도시인들의 눈에도 띈 모양이다. 요즈음은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귀룽나무가 이곳 양재천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양재천의 귀룽나무는 양재천변의 나무 중 버드나무에 이어 봄에 가장 일찍 연둣빛 잎을 내고 구름처럼 흰꽃을 피운다. 그러나 내 눈에는 뭔가가 부족해 보인다. 용틀임하는 구룡(龜龍)의 모양을 볼 수도 없고 일부 나무는 상태도 좋지 않다. 아무래도 도심의 가로수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양재천변의 귀룽나무를 볼 때면 반가우면서도 괜히 마음이 짠하다.
양재천의 귀룽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