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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Sep 30. 2024

27. 그네

<양재천 산책>


양재천의 영동 6교에서 대치 유수지 쪽으로 걷다 보면 롯데타워가 바라보이는 곳에 그네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한 곳은 은행나무와 벚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답답한 감이 있으나, 다른 한 곳은 나무 사이로 시야가 넓게 트여 아래로는 천변 하구와 멀리 롯데타워까지 훤히 보인다. 


남편과 이 길을 산책할 때 우리의 눈길은 항상 시야가 좋은 편의 그네로 향한다. 그네는 거의 대부분 누군가의 차지가 되어 있지만 어떤 날은 우리 차지가 될 때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날을 억세게 운 좋은 날로 여기면서 행복해한다. 

남편은 “부인에게 세계일주는 못 시켜줘도 그네는 밀어드려야죠”라는 우스갯소리를 곁들이며 발을 굴려 열심히 그네를 밀어준다. 원래도 상체보다 다리가 약한 남편이지만 큰 수술 뒤에 살이 더욱 빠져 그네를 밀어주는 남편의 다리가 젓가락같이 위태롭다. 

남편이 꺼낸 세계일주라는 말이 내 마음을 조금은 슬프게 만든다. 내게도 꿈이 있었다면 퇴직 후 남편이랑 세계일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대양 육대주의 아름다운 곳을 가보고 싶었다. 꿈꾼 대로, 예정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질병이란 암초가 우리 인생길에 나타날 줄 몰랐다. 물론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 암초가 눈앞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남편의 젓가락 같은 다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눈을 들어 롯데타워를 바라본다. 이제 점점 멀어지는 세계일주에 대한 꿈 대신 그냥 남편이 밀어주는 그네에 무심히 흔들리면서 행복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써본다. 남편이 살아서 그네를 밀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눈 아래의 뚝 사면 길의 숲 속에는 물까치들이 포르르 포르르 날며 서로를 희롱하고 있다. 물까지는 까치보다 몸이 작으면서 머리에는 까만 캡을 쓴 듯 검은 물을 들였고 꽁지 부분은 연한 하늘색 칠을 하고 있어 참 예쁘다. 이놈들은 여러 마리가 집단서식하며 함께 움직이는데, 대치유수지 쪽의 숲 속을 더 좋아하는 듯 주로 이곳에 모여 놀다가 가끔 영동 4~5교 쪽으로 집단 외유를 나갈 때도 있다. 물까치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면 날개가 없는 나는 그네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양재천의 물까치


그네는 우리를 피안의 먼 곳으로 날라다 주는 힘이 있다. 공기를 가르며 높이 솟아오르면 마치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비현실적인 세계로 날아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는 그네를 타는 여행 프로그램이 대 인기라고 한다. 인생 최고의 사진을 남기려는 젊은 여인들이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입고 그네로 모여드는 풍경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발리섬까지 가지는 못하였지만 나는 양재천에서 남편이 밀어주는 그네를 타고 창공을 가로지르는 꿈을 꾼다. 

또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들이 하늘 높이 쏫아올라 별들 사이에서 춤을 추던 광경을 떠올린다. 그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나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한 마리 새처럼 창공으로 솟아오르면 앙드레 류가 연주하는 세컨드 왈츠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는 흥겨우면서도 비감의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나의 처지처럼. 


양재천의 그네를 타고 높이 높이 날아오르지는 못하지만 잠시 빠졌던 환상에서 깨어나 빨리 그네를 비워주려고 일어선다. 그 그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양재천의 그네:어떤 부부의 뒷모습을 슬쩍 찍었다


한 번은 저만치서 바라보니 그네가 비었길래 발걸음을 약간 빨리했는데 우리 앞을 어떤 노인이 거의 꼬꾸라지듯 달려가 그네에 먼저 앉았다. 나는 속으로 우리가 저 그네를 차지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냐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한 번은 그네를 향해 가는데 자전거를 탄 꼬맹이가 달려가더니 그네를 잡고 동생을 불렀다. 한발 늦었다.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애들의 할아버지인듯한 노인이 두 아이를 태운 그네를 밀어주고 있어 역시 우리가 한발 늦기를 잘했다고 위안을 삼았다. 


지나가다 그네를 바라보면 보통은 홀로 앉은 사람이 그네에 흔들리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 혼자 앉아 흔들리며 휴대폰을 보든, 노인이 그네에 앉아 생각에 잠기든, 부부가 그네를 밀어주며 서로의 흉금을 터놓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그네를 타던 그네를 탄 사람들은 행복하게 보인다. 

이 행복을 여러 사람이 나눌 수 있게 혼자의 독점을 오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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