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양재천을 걷다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얀 꽃들이 눈에 띄었다. 7월에 웬 꽃인가 하여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니 회화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아! 그렇지. 7월은 회화나무의 계절이지. 양재천에 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하였는데 길바닥에 떨어진 꽃을 보고서야 회화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영동 2교 쪽으로 가다 대치중학교 건너편 계단 쪽에 회화나무 몇 그루가 오로로 모여있었다. 수령이 꽤 된 듯한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과의 햇볕 경쟁에 나서느라고 그랬던지 키가 껑충 높았다.
회화나무는 제멋대로 자란다고 하여 예로부터 학자수(學者樹)로 불렀다고 한다. 영어 이름도 Chinese scholar tree라고 하니 동서양의 학자들은 제멋대로였던가 보았다. 양재천의 이 회화나무들도 그러한 속설을 맞추려고 그러는지 제멋대로 하늘을 향해 뻗었고 일부 나무들은 가지를 잘려 상이용사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회화나무였다.
회화나무를 의식하면서 양재천을 걸어 보니 대치유수지 방향으로 쌍룡아파트 쪽으로도 두어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었다. 이곳의 회화나무 수형은 대치중학교 앞 쪽 나무들보다는 정돈되어 있고 아름답게도 보였다.
회화나무는 같은 콩과식물이어서 그런지 아카시 나무와 상당히 유사하게 보인다. 나뭇잎 모양이 꼬실하게 보이는 점, 하얀 꽃이 많이 달리는 점, 열매 꼬투리가 콩 꼬투리처럼 생긴 점 등이 서로 닮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회화나무는 꽃의 색이 연두색을 품은 미색이어서 눈에 덜 띄고 꽃 모양도 아카시나무 보다 훨씬 수수하다. 향기도 아카시보다 약하고 나무줄기에 가시도 없다. 무엇보다 아카시나무는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지만 야생의 생명력으로 억척같이 번식하는 나무라면 회화나무는 인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나무라는 점이 다르다.
두 나무의 생존전략도 매우 다르다. 아카시나무는 벌을 유인하느라 흰 꽃을 무더기로 피우고 진한 향기를 만들며 많은 꿀을 준비하느라고 수명이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비해 회화나무는 약간 녹색이 도는 미색의 작은 흰 꽃을 무수히 매다는데(느티나무나 은행나무, 회양목에서 언급했지만 꽃인지도 모를 녹색의 작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대체로 오래 산다), 향기도 진하지 않고 꿀도 별로 없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나무는 오래 사는 것은 천년을 산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은행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거목 중의 하나이며, 현재 500~1,000년 된 나무 10여 그루가 노거수로 지정되어 있다.
회화나무라는 이름은 괴목(槐木)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 괴(槐)를 중국말로 홰라고 읽었다고 한다. 괴(槐)는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합해져 만들어진 글자로 귀신을 쫓는 나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궁궐이나 집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회화나무가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중국의 영향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회화나무를 상스러운 나무라고 하여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 기원은 주나라 때 회화나무 세 그루를 조정에 심고 삼공(三公: 우리나라의 정승에 해당하는 벼슬)이 그 나무 아래서 정사를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나라는 공자가 흠모한 유일한 국가이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흠숭하여 《주례(周禮)》를 늘 강조하였고 이것이 초기 유가사상의 본보기가 되었다. 따라서 주나라 조정의 중요 신하들이 회화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돌보았다는 상징성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정의 신하들이 조정회의에 나갈 때 회화나무로 만든 홀을 들고나갔다고 한다.
이 주나라 조정에서 묘지에 심을 수 있는 나무 종류를 정해주었는데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를, 왕족은 측백나무를, 고급 관리는 회화나무를, 학자는 모감주나무를, 서민의 무덤에는 사시나무를 각각 심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군주나 왕족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한정이 되어 있을 터, 제힘으로 출세하는 최고의 길이 고급 관리였던 바에야 회화나무야말로 가장 흠모받는 나무가 아니었을까.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회화나무가 학자나무로 칭송되면서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을 얻어 출세한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날 때 그 기념으로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는 회화나무의 열매가 양반의 갓끈을 장식하는 구슬과 닮았다고 해서 양반수로 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런 역사성으로 인해 회화나무는 상스러운 나무, 학자수, 집안에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나무로 여겨지면서 집 안팎에 이 나무를 많이 심게 되었다. 개인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 가로수로 회화나무를 심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은 옛 당나라 수도 인 장안(지금의 시안)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가로수로 회화나무를 심었다.
서울에서는 압구정동의 가로수들이 이 회화나무로 되어 있다. 양재천에 황금 버드나무나 황금 뽕나무를 대량 식재한 강남구에서 어째서 이곳에 회화나무는 별로 심지 않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앞에서 회화나무가 제멋대로 자란다고 하여 학자수로 불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의 기개를 높이 사 학자수라고 불렀다니 학자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것 같다.
학자는 세속의 단일한 의견 일치가 싫어 학자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시대는 수도 임치에 온천하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극진히 대접하여 학자들의 전성시대를 열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 도성의 남문을 직문(稷門)이라고 했는데 이 직문 아래에 학자들의 저택을 지어 학자를 초빙했다고 하여 직하학궁이라고 하였고 직하학궁에는 유능한 인재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사상을 펼치고 학문을 추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제나라에는 수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각자 자기 사상을 펼치는 제자백가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제자백가 사상이 중국의 철학적 기반이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학자가 자유로운 영혼을 택해 자기 사상을 펼쳐나가는 것은 국가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렇게 회화나무는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 하여 귀히 여겨졌다. 그러나 함부로 아무나 아무 곳이나 심을 수 있는 나무는 아니었다. 그래서 몇백 년 이상의 회화나무 고목은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에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