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요즈음 남자 네 명이 유럽을 다니며 찍은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TV 프로그램이 화제다. 유럽의 멋진 풍광들이 지나가는 것도 아름답고, ‘먹방을 찍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세끼 식사를 준비하고 음미하는 모습들이 사뭇 진지하여 나도 모르게 빠져들면서 보았다.
이들이 피렌체에서 토스카나로 가는 도중 만나는 밀밭과 밀밭길을 가르며 한없이 이어지던 사이프러스 나무 가로수 길은 그야말로 마음을 심쿵하게 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발 도르차 평원의 밀밭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식량의 보고이다. 그 밀밭을 보면서 영화 <글리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군이 가족을 만나러 천국으로 가면서 밀알을 어루만지던 마지막 장면이 회상되기도 했다.
끝없는 평원에는 기다랗게 쭉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일부러 콕콕 박아놓은 듯 줄을 이어 서있다. 어디서 본듯한 아득한 풍경이다. 그 친밀함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과거 우리 시골에서 보았던 미루나무 때문인 것 같다. 그 많던 미루나무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나라의 시골길에 아직도 미루나무가 남아있다면 토스카나의 사이프러스가 그렇게 부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남아시아와 지중해가 원산인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침엽수로 키가 40~45m까지 자란다. 속명의 Cupressus는 원산지인 키프로스 섬의 지명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뜻은 `영원히 산다`라고 하니 이 나무가 오래 산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옆으로 번지지 않고 위로 40~45m까지 곧추 자라는 것이 이 나무를 특출 나게 보이게 한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남부유럽 쪽으로 가면 자주 조우할 수 있다. 나는 특히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을 지키고 선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이 나무들은 마치 레콩퀘스타에 저항하며 이슬람 궁전을 지키기라도 할 듯 장엄하게 궁전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남유럽의 사이프러스처럼 키 큰 나무는 아니지만 양재천에도 키 작은 측백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양재천을 산책할 때 이 미니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보면서 알람브라 궁전의 키 큰 사이프러스들을 회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호도 사랑한 듯 그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 등 사이프러스가 들어간 명화들을 여러 점 남겼다. 그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그렸는데, 토스카나 지역의 모습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사이프러스 비슷한 나무에 포플러가 있다. 포플러(poplar)는 버드나무과 사시나무속 활엽교목으로 사이프러스의 측벽나무과와는 과가 다르나. 그러나 삐죽하게 높이 자라는 특성 때문에 사이프러스와 유사한 이미지를 준다.
사시나무속에 속하는 우리나라 자생종 나무에는 사시나무, 황철나무, 당버들 등이 있고 외래종으로는 미루나무, 양버들, 은백양, 이태리포플러 등이 있다. 이 사시나무속은 식물분류학적으로 포플러 속을 가리킨다. 포플러 속의 학명은 Populus spp.이다. 속명 'Populus'는 ‘인민’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왔을 정도로 사람과 가까이 있고 친근한 수종이다. 근래에는 포플러 속을 통칭하는 용어로 포플러가 통용되고 있지만, 개량종 포플러가 많이 보급되던 1950~70년대에는 중부 이북지방에서는 포플러를 주로 미루나무로, 일부 남부지방에서는 버드나무로 부르기도 했다. 미루나무라는 말은 미국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라고 해서 미루나무로 불리다가 후일 미루나무로 바뀌었다고 한다. 긴 잎자루를 가진 포플러 잎들은 미풍에도 잘 흔들려 ‘사시나무 떨듯 한다’라는 비유를 낳기도 하였다. 사시나무 무리는 재질이 물러서 쓰임에 제약이 있지만 빨리 자라는 나무로 유명하다. 1960~198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시대에는 시급한 목재수요에 맞추어 이태리포플러와 은사시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은 적도 있다.
이때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양재천에도 이태리포플러와 은사시나무들이 있다.
양재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키 큰 이태리포플러 한 그루가 서 있다. 굵고 장대한 이 이태리포플러는 대치교 이쪽 편에 높이 서서 양재천 하류를 내려다보고 있다. 큰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포플러 잎들은 미풍에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어 안쓰러운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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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포플러 나무는 빨리 자라고 나무가 장대한 이점이 있으나 수분이 많은 평지나 강가밖에 심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유럽이 원산인 은백양에다 우리나라 재래종 사시나무를 인공 교배하여 만든 나무가 ‘은사시나무’이다. 산에서도 잘 자라 60~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식목하였는바, 산하를 지나갈 때 자작나무처럼 하얀 수피를 자랑하는 나무 무리가 보이면 틀림없이 은사시나무 그룹이다.
은사시나무도 잎이 언제나 살살 흔들리고 있어 사시나무속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나무는 줄기 수피에 독특한 다이아몬드 문양이 새겨져 있어 구분하기가 쉽다. 다이나몬드 문양의 수피로 치장한 이 나무는 멀리서도 잎을 계속 흔들며 `나 여기 있어요`를 외치는 것 같다.
미루나무라고 불린 포플러는 농경지의 방풍림이나 마을의 조경목으로 많이 심었고 신작로의 가로수로 많이 이용했다. 이 때문에 시골길에 키 큰 미루나무가 많았다. 미루나무가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것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이 미루나무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속성수(速成樹)인 이 나무는 약 50년 정도 자라면 교목이 되어 태풍에 쉽게 쓰러질 위험에 처한다. 다른 나무에 비해 무른 특성도 있고, 무엇보다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하여 미루나무는 가로수로서 차츰 밀려나더니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옛날에 엄마 친정이 있던 철마의 구칠에 가면 길가에 미루나무가 쭉 서 있었다. 어릴 때 방학을 맞아 시골에 가면 이모가 야간 극단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깜깜한 밤중에 이모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올 때 기다랗게 서 있는 미루나무는 공포 그 자체였다.
시골 외할아버지는 어린 우리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잘해주셨다. 할아버지의 레퍼토리 중 하나가 당신이 밤중에 만난 도깨비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한밤 중, 집에 돌아오다가 도깨비를 맞닥뜨렸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밤새 도깨비와 싸워 그놈을 미루나무에 꽁꽁 묶어두고 집으로 왔는데, 날이 밝은 뒤 나가보니 도깨비는 간 곳 없고 빗자루가 나무에 묶여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길가의 미루나무는 빗자루를 탄 도깨비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를 내 가슴에 심어주었었다.
그러나 지금 미루나무는 다 사라져 버렸고, 이탈리아의 사이프러스 가로수길을 바라보니 그 옛날 향수가 되살아 나면서 새삼 미루나무가 그리워진다. 시골길에 메타쉐콰이어나 왕벚나무만 심지 말고 미루나무도 다시 심어 보면 어떨까? 배부른 시대에는 향수산업도 소환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