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6월 말의 양재천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나무가 있다. 죽나무이다. 이 나무는 대나무처럼 생겼다고 하여 죽나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 눈에는 이 나무의 어디가 대나무를 닮았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다만 나무가 눈 길을 끌 때는 보통 꽃이 필 때이다. 맞다. 지금 계절에 이 죽나무에 주렁주렁 꽃이 열려 어디에서든 죽나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죽나무에는 참죽나무와 가죽나무가 있는데 너무 비슷하게 생겨 구분하기가 어렵다. 꽃이 피는 요즈음이 두 나무를 구분하기 딱 좋다고 한다.
참죽나무와 가죽나무는 너무 비슷하게 생겨 혼돈을 주지만 참죽나무는 멀구슬나무과이고 가죽나무는 소태나무과라는 것이다. 나무모양도 잎모양도 비슷하게 생겨 같은 과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듯한데, 꽃 모양과 특히 열매 모양이 확연히 틀리니 다른 과로 분류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참죽나무와 가죽나무의 가장 중요한 구분은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참죽나무의 어린순은 나물이나, 장아찌, 부각 등을 만들어 먹는다. 특히 경상도지역에서는 참죽나무의 새순은 별미를 선사하는 새봄의 진객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남부지방에서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로, 가죽나무를 개가죽나무로 불러 혼돈을 일으킨다.
재직시절 진례에 김 씨 성을 쓰는 한 아주머니가 가죽부각을 매우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인터뷰를 갔던 적이 있었다. 남부지방에서 식용하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앞에서 밝혔다.
가죽 순은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지금도 이른 봄에 시장에 나오는 가죽나무 새순은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주로 고추장에 찔러 넣아 장아찌를 해서 먹었는데 쫀득쫀득한 식감도 좋고 향도 좋아서 이른 봄 식탁의 진객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죽나무의 가장 고급스러운 용처는 부각이었다. 가죽 잎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채반에 널어 대강 말린 다음 찹쌀풀을 묻혀 꾸득하게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놓으면 최고급 안줏거리 내지는 밥반찬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더욱 귀한 음식이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찾아간다는 기별을 받고는 가죽 잎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해 두고 찹쌀 풀을 쑤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찹쌀풀에는 마늘, 고춧가루, 소금, 깨소금 등을 넣어 맛을 들게 해 놓았다. 그리고 가죽 순을 찹쌀 풀에 묻혀 빨래 널듯이 널어 말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튀겨주는 가죽 부각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입안에서 파삭하게 부서지는 질감도 좋았고 맛도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향이 좋았다. 가죽부각의 매력에 듬뿍 빠졌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주머니 성씨가 사성(賜姓) 김 씨라고 하였다. 사성(賜姓)이란 임금이 성씨를 하사한 경우를 일컫는다. 무슨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성을 하사 받았을까 하여 흥미진진하게 그 유래를 들었었다. 김충선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그때 처음 들었다.
임진왜란 때 규슈에서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 장수 중에 사야가(沙也加)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조선과 중국을 흠모하고 있었다. 조선으로 출병할 때 선비의 나라 조선을 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부하들을 설득하여 조선 땅에 닿자마자 조선에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가 조총 만드는 법을 조선군에 전수해 주었고 일본군과 직접 싸워 종 2품 가선대부의 직책까지 받았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높이 사 우리나라에 귀화한 그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때 선조는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라고 하여 김해 김 씨라는 성을 사사했고 그 후손이 아직도 진례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김충선이 바로 김해 김 씨의 시조였던 것이다. 그때가 90년대 초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 장수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여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머니로부터 듣는 이야기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몰랐다. 훗날 김충선은 결혼하여 오늘날의 대구의 청도에 해당하는 녹촌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 김충선에게 선조가 땅을 하사하자 그는 남의 나라에 와 살면서 만석꾼의 땅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최소한의 봉토만 받아 그곳에 세거지를 만들어 살았다고 했다.
내가 김충선 이야기를 듣고 한참 지나서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김충선 이야기를 하였다. 그전에 일본의 한 역사 소설가가 김충선과 관련된 책을 쓰면서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사야가의 과거를 복원하려 나섰고, 일본 NHK방송에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충선의 후손들은 한일 양국이 이제 갈등과 증오의 역사를 씻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녹동서원 옆에 ‘한·일 우호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가죽자반으로 인해 왜군 장수 사야가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왜군과 싸우며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을 구하는데 일조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례의 가죽 자반에 반했던 나는 묘목점에 가서 가죽나무 묘목을 구하였다. 4주에 만원을 주고 싸다고 흡족해하며 시골집에 갖다 심었다. 그런데 해마다 이 나무가 쑥쑥 자라는데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알고 보니 가죽나무가 아니고 개가죽나무였다. 개가죽나무를 표준어로는 가죽나무라고 부르니 묘목상에서 나를 속인 것은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경상도 지방에서 가죽나무를 찾은 나에게 먹을 수도 없고 엄청 빨리 자라는 개가죽나무를 판 묘목 상인이 당시 매우 원망스러웠다.
이 개가죽은 어찌나 생명력이 왕성하던지 잘라내어도 꿋꿋이 새 순이 올라와서 이것을 없애는데 애를 먹었다.
지금 양재천에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는 죽나무는 표준어의 가죽나무이다. 말하자면 남부지방에서 개가죽이라고 부르는 그 쓸모없는 나무이다. 그런데 어느 날 왕성하게 세력을 넓히고 있는 가죽나무를 바라보았더니 나무줄기에 까만 벌레들이 달라붙어 있어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이 곤충들은 꽃매미 유충이라고 하였다. 알로 겨울을 보낸 꽃매미는 5월에 부화하여 나무 수액을 빨아먹고 살아간다는데 특히 가죽나무나 포도나무를 좋아해 이들 나무에 많은 피해를 준다고 한다. 이 유충은 지금은 까만색이지만 좀 있으면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몇 번 더 탈피를 하여 날개가 있는 갈색 성충이 된다고 한다.
양재천의 가죽나무가 꽃매미 유충에 시달리고 있으니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