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번, 생각의 틈을 만들려고요.
작년 6월, 필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떠올렸던 질문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는 휘갈겨 쓴 글귀 하나를 휴대폰으로 찍어 카톡 방에 공유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필사를 시간 낭비라고 했다. 처음엔 나도 다른 사람의 문장을 따라 쓰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한참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하루 한 문장이 하루를 넘어, 제 삶까지도 바꿔놓고 있다는 걸.
어떤 날은 작가의 단어 선택에 감탄하며 여러 번 되새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문장의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을 덧붙여보기도 했다.
단순히 문장을 따라 쓰는 일이 아니라, 필사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우린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보고, 듣고, 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진짜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필사를 하며 이 질문 앞에 자주 멈춰 섰다.
누군가의 문장을 손으로 옮기는 순간, 생각의 틈이 열리고, 그 사이로 조금씩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의 꿈이 한낮 꿈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렸을 적 꿈꿔온 인생 궤도와는 전혀 다른 자리에 와 있는 현실은 깨닫게 되지만, 그럼에도 후회와 한탄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꿈을 재조정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꿈은 세계에서 내려와 현실에 발은 딛는다. 그러는 동안 마음의 공간과 탄력이 자라난다."
- 한성희,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
마흔을 넘긴 지금, 이 문장이 유독 가슴 깊이 다가왔다. 어린 시절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노력만 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조금 어긋난 것 같았던 길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다른 궤도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 와닿았다.
이 문장을 만난 후로,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발생하는 것도 결국 삶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줄 아는 힘을 갖는 일이 아니었을까?
낮만 있는 인생이란 불면증을 앓고 있는 인생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다.
- <이어령의 말>
또 한 번은 이 문장을 따라 쓰면서 펜을 놓지 못했다. 밝은 것만 좇으며 사는 삶이 정말 건강한 걸까, 되묻게 되었으니까. 인생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필요하다. 고요와 멈춤, 슬픔과 침묵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필사의 힘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단지 멋진 말을 옮겨 쓰는 게 아니라, 그림자까지 마주하게 해 준다는 것. 괜찮지 않은 날들, 조용히 멈춰 선 순간들이 결국 저를 다시 걷게 하는 것 같다.
아무리 피곤해도, 필사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물론 필자보다 훨씬 더 오래 이 습관을 이어오신 분들도 많다는 걸 잘 안다. 자화자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꾸준히 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필사는 제게 지속성의 중요함과, 글쓰기 스킬보다 '나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 왜 필사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하루 한 번, 생각의 틈을 만들려고요.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루 한 문장을 따라 쓰는 순간만큼은 조금 더 느리게, 더 깊게 지나간다. 그렇게 천천히 나를 또 알아가고 있다.
또 하나 흐뭇한 건, 아이도 옆에서 성경 필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올해 초 성당에서 우수학생으로 상도 받았다. 꾸준함이 주는 선물이, 아이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필자가 그동안 쓴 필사 노트를 아이에게 보여줄 날이 올까? 아빠가 어떤 문장을 좋아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다면 너무 기쁠 것 같다.
하루에 한 문장씩 따라 써봐.
너의 생각을 틔우고, 너만의 길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