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온다, 도망치고 싶지 않다 (2)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슬픈 존재들에게 이 각본을 바칩니다

by 삶예글방

각본집을 시작하는 페이지에 들어간 첫 문장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슬픈 존재들에게"

연극을 보기 전에도 각본집은 꼭 사가지고 와야지 했지만, 보고 나서는 더욱 절절히 각본집을 소장하고 싶어졌어요.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혀서 아릿했거든요. 활자로 곱씹을 수 있다니, 참으로 다정한 배려를 담은 똑똑한 준비구나! 감탄했어요. 연극을 다 보고 나와서 벅차는 마음으로 티켓박스에 가서 각본집 구매하고 뒤돌아서자마자 골목길에서 가만히 서서 첫 장을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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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러닝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어요. 걷기보단 뛰고 싶더라구요. 숨을 헐떡이며 뛰어간 정류장에 제가 타야할 버스가 바로 곧 왔고, 땀을 가득 흘리며 뒷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곤 바로 다시 각본집을 펼쳤어요. 그리곤 가장 마음에 강렬히 남았던 장면의 페이지를 찾아 읽었습니다. 노트를 꺼내 휘발되기 전에 짧은 단상들을 조급하게 받아적었습니다.


충격.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오마주 없이 순수하게 쓰인 것 같은 작품을 만났다. 지금의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가득했던 작품. 나는 왜 늘 이렇게 응원하러 갔다가, 마음을 주러 갔다가 배로, 말로 받고 오는 것일까. 아아 어쩜 이런 작품을 썼을까. 어떻게 그런 호흡으로 외쳤을까. 어쩜 그런 눈으로 관객을 바라봤을까. 날것의 순수함. 그 눈빛과 감정 표현의 호흡과 발성들. 거칠고 투박하지만 깊이 와닿았던 문장 문장들.


깊이 요동치는 파도를 몰고 온 연극,「파도가 온다 도망쳐라」 를 보고 이후에 저의 마음에 새겨진 감정과 생각의 기록을 이어서 남겨보려고 합니다.



2025. 10. 2


극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마야, 엘리엇, 파울리.

마야는 거대한 사고를 겪고 홀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유일하게 파도가 몰려온다며 계속 도망치라 외치는 사람입니다. 엘리엇은 '후회 없는 선택'이라는 이름의 여관을 운영하고 있죠. 자꾸만 보이지도 않는 파도를 경고하는 마야가 답답하고 한심하기만 합니다. 파울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밝히기로 소문이 난 과일가게 사장님 입니다. 셋은 친구 입니다. 극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세사람의 관계는 그저 마을 친구 이상의 관계라는 것을, 세 사람을 관통하는 비밀스런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름도, 배경이 되는 마을도 저에겐 낯섭니다. 왜 먼 나라의, 그리고 옛 시대를 선택해서 극을 썼을까요? 저는 그것도 궁금해졌습니다. 처음엔 그런 호기심으로 따라갔지만, 곧 그 배경이 되는 시기와 지역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기의 업을 이어가는 자영업자 엘리엇과 파울리의 삶은 책방을 운영하며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저에게 가깝게 다가왔어요. 녹록치 않은 생계, 그 와중에 웃음과 위로가 되는 친구들의 존재. 각자 지닌 깊이 곪아있는 상처나 비밀스런 기억, 어떤 지나간 선택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요.


세 사람의 이야기 모두 각각 저마다 사연과 고통이 있어 공감이 가고 짧은 시간에 정이들어버렸지만, 마야라는 인물, 그러니까 파도가 온다고 계속해서 친구들을 난감하게 하고, 본인이 스스로 위험해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소리치는 이상한 친구 마야가 가장 깊이 마음이 가고 공감이 갔습니다. 가장 크게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인물인데 말이죠. 저에겐 마야가 단독 주인공처럼 느껴졌어요. 그녀가 유일한 생존자로 남게 된 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저의 마음을 긁기도 저리게도 만들었던 마야의 대사들을 몇 줄 가져와 봅니다. 아 그 전에 파울리의 문장 먼저 가져올게요. 파울리의 성품과 캐릭터도 정말 좋았어요. 제가 닮고 싶은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툭하면 주요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엘리엇이기도, 현실 감각 없어 보이는 거대한 문제를 외치는 면에서 마야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실은 파울리같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끝까지 곁을 지키는 사람, 누군가 보지 못한 그늘 이면의 미약한 온기를 찾아내 지키는 사람이요. 파울리가 지난날로 이어져 지금껏 후회하는 유년시절의 한 사건에 대해서 남긴 대사가 있거든요. 그 말이 윙윙 머릿속을 멤돌았습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혼자 남게 되니까 이제서야 걱정이 드네. 돌아온 톰도 이렇게 ⋯⋯ 외로웠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혹시 우리는 ⋯⋯ 마주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진정' 우리는 - 마주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저는 이 대사가 들릴 때, 맞아요! 라고 소리를 지르며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꾹 참고 이 글로 남깁니다. 우리는 메스껍고, 두렵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과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들과도 우리는, 마주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내가 그 '이들'이 될 수 있으니까요. 언제든. 어느곳에서든.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마야의 대사를 가져와 봅니다.


엘리엇! 파울리! ⋯⋯ 대답이 없네. 다들 도망친 걸까. 너무 늦지 않게 대피한 거면 좋겠는데. 파도는 어디까지 왔지? 여기선 보이지가 않아. 피가 계속 나오네.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이게 내 끝이구나. 그건 확실히 알겠다. 그나저나 괘씸하네. 날 버리고 가다니. ⋯⋯ 그 녀석들이 날 버리고 갔군. 둘 다 대답이 없는 걸 보면 같이 도망친 거겠지. 다행이야. 다행이긴 한데. ⋯⋯ 그래도 혼자 남고 싶지는 않았어.



아 그리고 엘리엇이지만 다른 엘리엇 (이 부분은 스포가 될 수 있어 이렇게만 설명하겠습니다)의 대사도 저에게 명대사로 남았죠.


마야. 하면 안 되는 일은 하지 말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야 하는 일을 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면 안 되는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 이 문장을 하나 하나 순서대로 듣는데 주변의 모든 공기와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각 문장마다 한가지씩의 저의 삶의 고민하던 상황들이 1:1로 대칭되어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순간 명상에 들어간 것 같아요. 그리곤 암전이 된 까만 공간을 바라보며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하면 안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에 덜컹했는데 떠오른 그림은 돈을 위해 뭐든 해야할까, 혹은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쳐버릴까 했던 저를 그린 장면이었어요. 아프게 찔렸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엔 가슴 가득 따스하게 책을 두고 도란도란 친구들과 대화 나누던 밤이 떠올라 울컥했습니다. 계속 하고 싶어서요.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하고 싶다는 마음을 마주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라는 이야기엔, 제가 작더라도 사는 동안에 살고 싶어지는 이야기를 남기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말자는 굳은 당부의 손이 제 어깨를 토닥이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이 말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륵 흘렀는데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떠오르며 다시 막막하고, 그러면서도 모르겠는 희망이 피어오르고, 슬픈데 기쁘고, 두려운데 행복해지는 말도 안되는 이상한 기분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야의 이어지는 (제 기준) 명대사가 앞서 혼란스러워 갈증이 더해진 마음에 시원한 이온음료를 가득 따라주었어요. 10키로 마라톤 마치고 아이스박스에 넣어둔 파워에이드 받아 마시는 기분이요.


(객석을 향해)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인데. 술 마시기? 사과 축내기? 모르겠네. 아니면 뭐, 여기 이렇게 앉아서 자네들한테 이야기하는 거?

(마야, 몸을 일으킨다.)

그래, 자네들은, 자네들은 아직 여기에 있군. 자네들이 있어. 자네들이 아직까지 이 여관에 있다고. 저기, 다들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도록 해. 그래야만 하네.

나는 전설적인 선원 마야. 모두가 실종된 쿼터백 호의 유일한 생존자. 이건 내 이야기야. 내 무용담이기도 하고, 내 죄와 죄책감의 이야기면서, 슬픔과 증오, 분노와 복수, 그리고 대화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라네.

(⋯⋯)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나를 알고 있고,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그래, 자네들은 분명 내 말을 믿을 거야. 그럼, 당연하지! 그건 나에게 엄청난 용기야. 그리고 그건 바로 우리의 힘이지! 믿어주는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있으면 우리가 해내지 못할 일은 없어. (⋯⋯) 다들 어디든 꽉 붙잡도록 해. 마지막 항해가 될 거니까. 다들 끝까지 힘을 내자. 나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를 알고 있고,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저에게도 엄청난 용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와 공기처럼 곁에서 나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 햇빛처럼 아쳅토라는 살롱 공간의 존재 이유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말과 마음을 건네는 친구들. 곁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을 응원하는 사랑들. 어디든 꽉 붙잡을 곳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파도가 치는 중에 둘러보며 발견한 겁니다. 독백인줄 알았는데 대화였고, 고백이었고, 도와달라는 구조 신호였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되었어요. 이 대사와 목소리 덕분에요.


그리고 지금,, 아껴두었던 각본가의 말을 읽었습니다.


⋯⋯ 저는 세계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윤리와 도덕이 미래의 희망에 기반한다면, 우리의 결말이 절망으로 정해지는 순간 윤리와 도덕은 저버려도 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요.

희망과 관계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친절하고, 쓰레기를 줍고, 동물과 벌레를 살리고, 차별과 혐오에 같이 저항하는 일 등입니다.

만일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변함없는 절망이더라도 저는 언제나 그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뜨거운 젤리를 가득 삼키는 기분입니다.

오후에 책방을 마감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며 핸드폰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끄적여두었습니다.




무엇이 도망치는것
나에게 파도는 무엇일까

내가 두려웠던 것.
무엇이었을까?

용기내어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계속 말한다.

나무를 심은 사람 처럼 길게 보고 믿자
그렇지만 하루하후 눈앞에 집중하고 한발씩만 나아가자

내게 파도는 .. 그러니까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



여기까지 적고 서브웨이에 가서 저녁으로 머쉬룸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창가에 아르바이트 모집을 보고 지원할까 고민하면서요. 그리고 책방 업무를 마무리 하기 전, 아르바이트 공고 열 네 곳을 스크랩하고 열 두 곳에 지원을 넣었습니다. 정직원 회사 채용 공고에는 아직 한 군 데에도 지원하지 못하고 지원서만 써두었어요. 외칠 준비도, 파도를 마주할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모래사장 앞에, 깜깜한 바다 앞에 서있습니다. 내 사랑의 일이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러다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계속하지 못하게 될거라는 걱정과 불안이 나를 누르는 날들을 보냅니다.


그런데도 나는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봅니다. 놀라운 속도로 줄어가는 생활비 통장의 숫자. 내야 할 돈을 준비해야할 날짜. 곧 닫거나 옮겨야 할 지 모르는 아쳅토 공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동업자 수린과의 동업 종료. 그리고 또 오래전부터 바라보았지만 요즘 더 짙고 크게 위협하는 파도도 있죠. 사람들이 다정과 상냥, 사랑과 존중보다는 혐오와 경멸, 판단과 구분에 열광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이런 절망이 가득 몰려오는 중에도 자신의 일을 빛나도록 최선을 다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


저는 지금 다가오는 파도가 두렵습니다. 혼자서 해내지 못할 문제 상황이 많습니다. 도와주세요. 곁에 있어주세요. 의지하고 싶어요. 주는 사랑만큼 갚지 못하는 날들이라 죄송해요. 하지만 힘을 주시면 잘 일어나볼게요. 그 과정을 다른이에게 또 다른 힘으로, 삶에 대한 의지로 선물하며 갚아 볼게요. 그렇게 도망치지 않고 서서 맞아 볼게요. 올라타볼게요.





✴︎ 덧붙이는 말


생에 아찔한 순간에 '후회 없는 선택호'를 타야겠다 생각하게 만든 작품을 쓰고 올려 준 책 친구 도요님, 그리고 맑고 깊은 눈으로 한 문장 한 문장 가슴에 깊이 '할 일을 하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라' 말해준 인표님, 두 분 덕분에 제 선택에 후회를 조금 덜고, 용기를 더할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다른 배우와 창작에 힘써주신 예술가 분들. 연극 제작팀 UFO(Unidentified Feminist Opinions)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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