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의 마을

#6. 연의 이야기 (1)

by 삶예글방



“연아, 나는 있잖아. 세상을 용서하기 힘들어. 나 좀 도와줘.”



대답을 하려고 애를 써도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힘을 내어 다가가 손이라도 잡으려고 하는데 몸이 느려진다. 앞으로 한 발짝 내딛기도 힘에 겹다. 온몸에 땀이 나고 저리도록 힘을 주어 본다.



꿈이다.


연은 또 신록의 꿈을 꿨다.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연은 생각한다. '미워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연과 신록은 십 년 전 동네에 있던 작은 자연주의 책방의 독서모임에서 만났다.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그 공간에서 매주 다른 책을 골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세상을 함께 여행했다. 시간을 거스른 여행부터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나 존재가 되어보는 여행까지, 무엇이든 되어보곤 했다. 망상과 공상 사이를 오가는 ‘만약에~’ 놀이는 두 사람의 약속 언어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읽고 여행하다 만난 어떤 지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실록을 종종 마주하기도 했다. 마음과 상황이 맞았던 두 사람은 모임날이 아닌 때에도 함께 약속을 잡아 골목길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실록이 본 연은 부드럽고 차분한, 때로는 겨울철 호수같이 차가운 모습 속에 푸른 불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열 살이 될 때 무렵 자신의 이혼 후 술만 마시면 딸을 원망하며 때려왔다는 이야기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을 때, 그 폭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던 순간, 연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애써 소리치지 않고 신록의 양쪽 어깨를 굳게 잡았다. 어떻게 견뎠냐는 말과 함께 당장 집에서 나오자고 말했다. 물이 가득 고인 연의 큰 눈에 신록의 오래도록 지친 얼굴과 어깨와 팔, 손가락과 꿇어앉은 무릎까지 천천히 눈에 담으며 애썼다고 말하자 겨우 지키고 있던 눈물이 굵은 방울로 뚝 뚝 신록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곧 자신이 집에서 독립할 예정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같이 살자고 말했다.


연과 신록은 함께 살기로 결정하고 계획하면서 두 사람의 공간을 운영하는 꿈을 꿨다. 빵 굽는 서점을 운영해 보자고. 신록은 빵을 굽고, 연은 이야기를 굽는 삶을 살아보자 마음을 먹었다. 빵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선천적인 이유로 유제품을 먹지 못하는 연을 위해 우유와 버터가 들어가지 않은 빵을 만들어 팔아보리라며 돌연 제빵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혼자 남아 우유를 빼고 만든 빵을 가져와 연에게 먹여보기도 했다. 그렇게 제빵사 자격증을 따더니 베이커리 브랜드에 입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록은 어느 때보다 많이, 자주 웃었다.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마음을 갉아먹으며 몸집을 불리는 회사로 간 것인 줄은 몰랐다. 신록이 들어간 곳은 두 번째로 큰 베이커리 브랜드였다.


꼭 그렇게 큰 곳에 먼저 입사해야 해?

작게 시작하면 안 돼?


연이 물었을 때 신록은 3년만.이라고 답했다. 장비와 재료를 혼자 구해서 할 자신이나 여유도 없고, 이왕이면 첫 3년 동안은 넓은 범위의 기본적인 빵의 다양한 영역을 다뤄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급여가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입사 후 사정은 파악한 정보와 조금씩 모두 달랐다. 인간이 직접 만든 빵이 휴머노이드의 것보다 두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되는데도, 신록의 급여는 휴머노이드보다도 낮았다. 24시간 중 충전과 유지관리를 위한 시간 5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일할 수 있었던 휴머노이드의 근무 시간을 따라잡을 수 없고, 그가 만들어내는 빵의 양보다 한참 덜 만들어낸다는 이유에서였다. 신록과 같은 초급 베이커의 상황은 일을 배우기는커녕, 아주 기본적인 안전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휴머노이드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도리어 휴머노이드에게는 당연히 보장되는 ‘충전’의 시간이 신록과 같은 비숙련 신입 베이커들에겐 보장되지 않았다. 계약서의 표면상엔 지켜지는 것으로 보였던 권리가, 실제 노동 현장엔 존재하지 않았다. 교묘하고도 세심하게 피해 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무리해서 일하도록, 쉬이 포기할 수 없도록, 적절한 시기에 희망이 고문처럼 왔다.


중급 베이커 심사가 2개월 남았습니다.
신록 베이커님, 당신은 진급 후보에 선발되셨습니다.
심사까지 최선을 다해 맛있는 빵을 만들어 주세요.
당신의 가능성을 응원합니다.


중급 이상의 숙련자에게는 제대로 된 이름표와 급에 맞는 급여와 키친이 주어진다고 했다. 메뉴를 개발하고,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근무 시간도 4시간으로 줄어든다. 3년 정도 경력을 쌓으며 모든 종류의 베이킹을 마스터하면, 중급 베이커로 승급 심사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신록은 자기도 드디어 진급 대상자로 올랐다며 기뻐했다. 중급 베이커가 되는 날만을 기다리며 견뎌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빵을 건강하게 만들어 개발해 보겠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중급 베이커가 될 수 있는지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휴게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온전치 않은 도구들로 베이킹을 지속하는 과정에 데고, 손목과 손가락의 관절은 상해갔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신록은 점차 한 달에 하루 있는 온전한 휴일조차도 오롯이 쉬지 못하는 날을 이어갔다. 겨우 반나절 정도 교대가 만나는 날에도 다른 베이커 동료의 부상에 대체 근무로 나가는 날이 늘어나면서 고정 휴무라는 의미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록은 얼굴의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신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늘 잔잔하기만 하던 연의 마음엔 거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