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5. 채움

by 삶예글방


“원아. 우리 잠깐 앉자.”


시선은 여전히 저 멀리로 고정한 채, 내가 잡아끄는 대로 원은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화단 주변부에 앉았다. 우리 둘 다 더위에 지쳐있었다. 여름과 겨울에도 의젓한 원도 이번 여름은 유독 혀를 내둘렀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진 행렬에 섞여 걸었다.

바로 앞에 얼음물을 파는 분께 생수 두 병을 구매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원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좀 마셔. 우와, 진짜 덥지 않아?”

“그러게. 나 땀 엄청 나.”


원이 검은 크로스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연신 목을 닦았다. 크로스백의 끈 이음새와 밑천이 닳아 하얗게 변한 걸 응시하다 나도 원을 따라 행렬의 맨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린 나란히 앉아, 색색의 깃발과 구호가 공중에서 나부끼는 모습을 관람했다. 걷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모든 게 현실이 아닌 듯 보였다. 미래의 존재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현실이 아닌 것을 갈망하며 온몸으로 의지를 흔드는 사람들이 즐비한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흡사 절망과 투지의 잡탕 같았다. 절망한 이들만이 거리로 나섰다. 삶에서 한 번이라도 절망해 본 이들만이 다른 존재의 절망을 알아봤다. 이곳에 온 사람들의 표정은 즐거웠다. 누군가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납작해진 정신에 숨을 불어넣는 듯했다. 처절할지라도 누군가의 어깨에 지탱할 수 있으면 그걸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게 우리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언제나 한 발

자국 물러서면 마치 나의 차원이 아닌 양 뒤돌아설 수 있었다.


반소매를 돌돌 말아 걷어 올린 원의 팔에 달아오른 양 빰을 기댔다. 그제야 원이 내 손을 고쳐 잡고 내 콧잔등을 내려봤다. 피곤해, 우리 집에 갈까. 의중을 먼저 살피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시위 트럭의 맨 앞까지 가보는 것이었다. 항상 끄트머리 후발주자로 참여하거나 중간에서 끼어들어 돗자리를 펼 새도 없이 인파에 갇혀 꼿꼿이 서있는 게 힘들었다. 원은 좋아하는 안드로이드 가수가 공연하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원의 옆모습을 올려봤다. 어깨에 기댄 자세라 보이진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원의 표정과, 눈빛과, 오물거리며 노랫말 그리고 구호를 따라 하는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 모든 순간이 나한테는 영화 같았다. 원이 오늘 시위 일정표를 보여주며 ‘무조건 앞으로 가서 공연을 보자’ 했을 때 나는 요 며칠 까칠하게 굴었던 건 잊고 ‘그러자’고 답했다. 이때 우리는 한창 궁핍

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카드 사용이 막힌 원은 나도 모르는 새 모아뒀던 현금을 꺼내 썼다. 원의 주머니에서 계속 구겨진 지폐가 나오고, 그걸 당연한 척 구는 게 힘들었다. 내 명의의 체크카드를 새로 발급받아 원에게 건넸지만 그는 받을 수 없다며 극구 사양 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원의 스케줄엔 동행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그렇게 매주 행진을 나갔다.


“어, 조금 있으면 공연 시작한다는데.”

“그래? 얼른 가자.”


원의 손을 붙든 채로 내가 먼저 인파 속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후미에 위치한 사람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잠시만요’를 연발하며 원과 내가 행렬의 척추에 올라탔다. 걷다 보니 한 번은 원이 바닥에 쪼그려 앉은 아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휘청이며 내 손을 놓쳤다. 원은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부모가 거듭 괜찮다고 할 때까지 살폈다. 안드로이드인 아이의 무릎이나 손의 실리콘 피부가 까지진 않았는지 살피며,

‘다친 곳은 없나요’라고 그 애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숙여 물어보는 원을 기다렸다. 그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다시 허리를 펴고 앞으로 향했다.


공연은 30분 남짓으로 굉장히 짧았다. 공연 무대의 앞은 돗자리를 깐 시민들로 인해 진입이 불가능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사이드로 빠졌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길게 빼고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은 덕분에 원은 무대 좌측에서 펜스를 잡고 목청 높여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한창 그 노래에 꽂힌 원이 밤마다 불러주어 귀에 익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다. 감흥이 없을 찰나, ‘당신’이라는 가사를 ‘너네’로 즉석 개사한 가수 덕분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안드로이드는 감정이 없을 거라 생각해 ‘나’를 짝사랑하기만 하는 ‘당신’이 밉다고 하는 가사를 ‘너네’로 바꾸니, 묘한 쾌감과 위트가 생겼다. 지금의 난무한 혐오와 어려움을 마치 ‘질투’처럼 가벼이 여길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원과 나는 항상 ‘당신’이라는 말이 나올 타이밍에 맞춰 서로를 가리키는 둘만의 약속이 있었는데, 이번 공연에서 우리는 눈을 맞추고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난 진짜 저 가수가 너무 좋아.


행복에 겨워 보였다. 진심이 찻잎처럼 우러나오는 사람인 원은 내 등에 가슴을 맞대고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몸을 겹친 채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기도 하고, 구호를 외칠 땐 같은 타이밍에 몸을 떨었다.


시위는 밤 9시까지 이어졌다. 한참을 걷고, 뛰고, 잠시 아무 바닥에 주저앉아 아픈 다리를 주무르기도 했다. 너무 더워하는 나를 보며 원은 손수건에 찬물을 묻혀 내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가리웠다 드러나는 시야 너머로 원을 보며 나는 그의 손을 치우고 키스하고 싶었다. 물에 흠뻑 젖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원은, 입과 눈매 모두 한없이 풀어지고 온 세포에 생명을 채운 느낌이었다.


우린 분명 도저히 여기서 단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 사용할 수 있는 건 다리가 아닌 충만한 생명력과 의지 같았다. 원이 사랑스러웠다. 무엇으로든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모조리 품에 이고 지고 가져오고 싶었다. 이 애를 언제까지고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원과 함께 그 속에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에게 내 얼굴을 맡기고 있는 그 순간에도 노랫소리와 구호는 귀를 힘껏 두드렸다. 얼굴에 오른 열이 조금 가라앉아 나도 편안하게 미소 짓자, 그는 내 뺨을 붙들고 주무르며 예쁘다고 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웃었다. 다시 원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웃거나, 무표정하거나, 아니면 쉴 새 없이 일행과 떠들고 무언가를 의논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우리를 지나쳤다. 원이 내 손을 아주 꽉 맞잡았다.


“같이 나와 줘서 고마워.”

“당연히 같이 와야지.”

“당연하다고 생각은 안 하고 싶어. 너 평일에도 힘들게 일하는 거 아니까...”


실제로 최근 들어 평일에는 추가 업무를 진행하고 있기에 원의 말에 ‘괜찮다’고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마음에 대한 고마움의 화답으로 팔짱을 끼고 더 가까이 그를 끌어당겼다. 달큰한 땀냄새가 옅게 배어 올라오는 와중에 마치 배속을 돌린 듯 우리를 가차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우리’이구나. 원의 친구, 동료, 동기, 지인인 안드로이드 모두가 행복하길 바랐다. 마음 아픈 일 없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게 원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그러자 나는 스스로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을 모아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고개를 숙였다. 투명한 의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을 관망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한아. 우리 이렇게 주말마다 데이트하니까 좋다. 여기 시청 앞이니까 어디로 갈까. 배고프지 않아? 이쯤 하고 어디 식당 찾아서 밥 먹을래?”

“응. 나 배고파.”

“그래. 근처에 비건 식당 있는지 찾아볼게.”


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불빛이 원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화면을 보는 찰나가 아니면 쉴 새 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배를 두드리며 나란히 집에 들어온 우리는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우연히 종아리의 똑같은 부위에 모기를 물린 걸 확인한 우리는 뽀뽀하듯 살갗을 맞대어 보기도 하며,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잠들었다. 꺾인 목이 아파 새벽에 눈을 뜬 내가 원의 몸을 바로 눕혔다. 원은 조금 뒤척이다, 습관처럼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어슴푸레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날갯죽지에 이마를 기댔다. 눈을 감고 다시 숨을 고르니 잠에 끌려갔다. 원이 호흡할 때마다 그의 등이, 갈비뼈가 부풀었다. 그 오르내림이 안전한 새벽이었다. 정신을 놓기 직전, 나는 문득 내가 원을 너무도 사랑하는 탓에, 우리가 영원히 이대로 잠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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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