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6. 전향

by 삶예글방



눈을 뜨면 원이 있는 곳에 내가 당도해 있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영에게 원의 데이터를 심은 후에도 한동안 일생에 뚫린 광대한 구멍을 메꾸지 못해 자주 고꾸라졌다. 영이 조금이라도 원과 비슷한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나는 분노와 연민을 구분하지 못해, 영을 보듬고 싶을 때 그를 무시했고 그에게 화가 날 때 악착같이 친절하게 굴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내 태도를 보며 영은 종잡을 수 없는 반응이 두려워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하기도 했다.


하루는 종일 방안에 처박혀 유튜브만 보고 있는 내 옆에서, 청소하고, 옷을 갈아입고, 먹은 걸 치우고 조용히 자리에 눕는 영의 등이 못 견디게 야속했다. 그래서 그에게 되레 화를 냈다. 네가 뭔데 그 자리에 눕느냐고.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영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






겹쳐 들린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영이 내 앞으로 불쑥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한아. 애호박을 사라는 거야, 양파를 사라는 거야. 황당하다는 말투의 영의 물음에 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둑맞은 현실감각이 그제야 돌아왔다. 그래. 우리는 지금 마트에서 저녁 찬거리를 사려고 둘러보던 중이었고, 된장찌개에 넣을 채소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애호박으로 그냥 하자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 나를 두고 영은 한숨을 푹 쉬며 애호박 두 개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괜히 다른 생각을, 그것도 영을 할퀴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던 게 사뭇 미안해, 괜히 딴청을 피웠다. 과자 코너 앞으로 직행하는 내 팔을 붙든 영이 고개를 저었다. A/S로 인해 이번 달 생활비가 과금되었다며, 간식을 줄이자고 강경하게 주장하는 영의 말에 수긍했다. 별 수 있나. 네가 하라면 해야지. 밑창이 높아 발바닥에 물이 닿을 일 없는 화장실 슬리퍼까지 담고 셀프 계산대로 향했다. 능숙하게 버튼을 눌러 포인트 적립까지 마치는 영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그의 아르바이트 생활에 궁금증이 일었다.


“요새 알바는 어때? 진상은 없어?”

“잘 없어. 가끔 너무 따분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 빼곤 다 괜찮아.”

“냉장고 보니까 레몬청 여러 개 있던데. 카페에서 쓰려고 만든 거야?”

“아니. 가져온 거야. 안해연 4층에 신규 안드로이드 교육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있었거든. 칼질이나 완력 조절 같이 좀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애들 위주로 뽑아서 같이 만들었는데. 냉장고에 있는 건 내가 만든 거라 그나마 제일 모양이 예뻐.”

“맛있겠다. 공장 사람들 좀 가져다줘도 돼? 나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서.”

“그래. 가져갈 때 무거우면 말해. 데려다줄게. 아, 내가 장바구니 들 테니까 네가 카트 넣고 올래?”

“응. 기다려.”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영이 마트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비켜섰다. 후문으로 나가는 입구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냉장고 맨 아래칸을 꽉 채운 레몬청 병을 보며 언제 이런 걸 만든 건지 놀라웠는데. 도저히 카페 냉장고에 다 넣을 수 없어서 모조리 안고 집으로 가져왔을 영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무거워하는 기색을 딱히 보이지 않는 데다, 영은 겨울옷을 정리한 박스도 머그컵 들어 옮기듯 가뿐히 옮길 정도니까.


만약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 영을 보았다면 안드로이드임을 단숨에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났겠지. 언덕을 오르는 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을 영을 떠올리곤 나도 모르게 큭큭 웃었다. 애들을 돕고 가르치는 모습은 또 어땠을까. 나에게 요리법을 알려주듯 뒷짐을 지고 서서 하나하나 지시하는 모습일지, 아니면 다가가 시범을 보이고 지도하는 모습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새롭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사기를 북돋기 위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을지도.

카트를 정리하고 영에게 되돌아가던 중 계산대에서 나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다. 그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며 인사를 나눴는데, 그 순간 나를 보며 짓는 친절한 미소에 기시감을 느꼈다. 주방에서, 화장실 앞에서, 길거리에서. 먼저 미소 짓고, 앞서 사과하고, 허리와 고개를 기꺼이 숙이는 영이 떠올랐다. 나와 부딪힌 그는 자신의 파트너의 어깨를 감싸고 유유히 멀어졌고, 나는 다정한 뒷모습을 곱씹었다.


타인에게 친절할 것.

입력된 프롬프트에 맞추어 행동하는 1세대 안드로이드는 대체로 비슷한 행동양식을 갖고 있었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참거나, 행복에 겨워하는 등 아주 미세한 감정의 축적으로 발생하는 표현의 결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흔히 ‘감정이 없다’는 식으로 취급받았고, 결정적으로 그 이유는 안드로이드 혐오 이유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였다.


영과 함께 살게 되면서 나는 원과 시위를 다니고, 연대 서명에 동참하고, 원의 안드로이드 친구들을 만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지점을 발견했는데, 그건 그들도 ‘학습’한다는 점이었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임을 알려주면 그는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내게 언성을 높이거나 ‘화가 났다’고 직접 말했다. 행복해도 눈물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자 그는 드라마의 해피엔딩에서 감격하는 나를 따라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영의 세계에 그어진 가능성의 빗금을 한 줄 한 줄 지워가는 것. 최근 들어 내게 그 일이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럼에도 내가 영과 함께하며 지치거나 지겹지 않을 수 있는 점은, 저 멀리서도 말을 건 타인에게 고개를 숙여 화답할 만큼,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하다는 그의 특성 덕분이었다.




“영아.”

“왔어?”

“아, 안녕하세요.”


가까이 다가가자 영이 환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황보라라고 합니다. 이번에 영 님 인터뷰하기로 한 매거진 에디터예요.”

“인터뷰요?”


의아한 표정으로 영을 돌아봤다. 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오늘 저녁때 말하려고 했는데, 기자님을 여기서 딱 마주쳤네. 내가 자주 보는 시사 매거진 있지. 거기서 이번 안드로이드 생활동반자 법제화 이후의 삶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셔서 인터뷰하기로 했어.”


영이 나를 찾아왔던 해. 길고 긴 망명의 시간과도 같았던 영의 떠돎이 끝난 그 무렵 국회에서 안드로이드를 생활동반자로 지정하여 보호자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동거하게 된 지 일 년이 넘었을 시점에 나와 영은 함께 주민센터에서 생활동반자 서류를 제출했다. 소유자가 아닌 법정 보호자가 불분명한 안드로이드는 A/S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점, 그리고 건강이 악화된 나의 응급실 방문 때문이었다.


에디터가 소속된 시사 매거진은 영이 안해연에서 매주 한 부씩 가져오곤 했다. 진보 성향의 잡지로. 정치사회와 밀접하게 관련된 평범한 인물 또는 직업인의 이야기를 싣곤 했다. 시의적절한 기사가 발행되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오기도 하는, 규모와 영향력이 큰 잡지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서 영을 인터뷰한다니.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어색했다.


“아, 그렇구나. 언제쯤 인터뷰하세요?”

“여기 명함 드릴게요. 인터뷰는 다음 주 수요일에 할 예정이에요. 감사하게도 영 님이 저희 스케줄에 맞춰주셔서 빠르게 날짜를 좀 잡아봤어요.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저는 한입니다.”

“그, 어, 괜찮으시면 한 님도 동반 인터뷰를...?”

“저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농담으로 여겨달라며 내 거절을 편하게 받은 에디터가 거듭 인사했다. 마트 한복판에서 헤어진 에디터와 우리는 각자 다른 길로 돌아섰다. 이제껏 장바구니를 혼자 들고 있던 영의 손에서 하나를 빼앗았다. 그와 나는 마트 출구까지 걷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제안일 뿐이었는데도 ‘인터뷰’라는 말에 심장이 뛰었다. 순간 화끈했던 목덜미가 가라앉질 않는 듯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인터뷰하기로 결정한 거야?”

“아. 지난주에 제안이 왔어. 아직 장소나 구체적인 질문 같은 건 없어서, 가닥이 잡히면 말해주려고 했지.”

“집에서 하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안해연에서 한다고는 하는데. 좀 그럴듯한 그림이 필요하면 집으로도 울 수 있고. 그건 일단 촬영을 해봐야 안대.”


“집은 싫어.”

“왜?”


글쎄. 크고 작은 이유는 없었다. 다소 추레한 풍경의 집을 공개하기 싫은 것보다는 왠지 마음속 울타리를 지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깨를 으쓱하자 영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주제를 돌렸다. 영은 귀가하는 내내 인터뷰와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제법 들떠 보였다. 다다음 주에 매거진이 발간되면 실물 잡지를 들고 올 텐데, 그전에 해당 잡지의 유튜브에 먼저 올라갈 수도 있다는 말에 우리는 미용실을 예약하기로 했다. 몇 년째 고수하는 붉은 머리칼에 펌을 할지, 단발로 자를지 여부가 그날의 논쟁거리로 남았다. 그렇게 하나의 이벤트처럼 여겼던 인터뷰가 실린 매거진을 받고 난 이후,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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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