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
물1
패들보드를 타면서
물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원래는 서핑을 지속적으로 하고 싶었는데 하루는 서핑 중 머리에 물기를 털다 잠자던 이석증이 '핑~' 하고 돌아온 바람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을 뻔 한 후 차선책으로 택한 운동이었다.
나는 바다에서 죽을 뻔한 적이 사실 여러 번임에도 - 그래서 그런가 - 물을 사랑한다.
4미터 정도의 보드 위에 서서 2미터 조금 안 되는 패들을 쥐고 노를 젓는다. 내 몸 기준으로 패들을 45도 각도로 쭉 뻗으면 중력이 알아서 물에 꽂아준다. 그리곤 온몸의 근육을 사용하여(특히 코어와 등) 패들을 몸 쪽으로 당겨 오기를 반복.
이렇게 두어 시간 하염없이 노젓기를 끝낸 후 몸의 물기를 꼼꼼히 닦고 보송한 차에 앉으면 애기였을 때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실 때마다 느꼈을 법한 개운함이 올라왔다.
물은 엄마가 내게 그리했듯 나를 위해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염치없는 나는 그래도 되겠거니 하며 노 젓는 리듬에 따라 마음속 폐수를 물속에 흘려버리고 집에 오는 것이다.
바빠서 정신이 없을수록 물을 찾아가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먼지 해야 할지가 보였다. 그래서 나는 물 위에서 엄마에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엄마아~!"
"에헤이!
물 위에서 전화하나! 안 위험하나?!"
"어 여기 얕아서 걱정 안 해도 된다! 경치 좋제? 아빠는? (아빠 좋아함)"
"우와! 참말로 경치 좋네! 아빠는 바둑 두러 가셨지. 엄마는 아침 묵고 쫌 쉴라고 눕었다!"
엄마가 잔잔한 일상을 보내는 중임을 확인하고 안도한 나는 쓰잘데 없는 얘기를 한참 하다 남편이 기다리는 지점으로 향한다.
물2
한 번은 라구나 비치에서(파도가 높기로 유명) 남편이 계속 깊은 곳으로 유도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별안간 바로 옆에 있던 남편이 만화처럼 하늘로 붕 솟았다. 너무 커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파도의 허리춤까지 딸려 올라간 남편이 나에게 소리쳤다.
"Duck!"
Duck : 수그리다, 재빨리 피하다
남편이 'duck'이라고 하지 않고 '파도 속으로 빨리 쑥 들어가서 잠영으로 이 파도를 통과해! 오리처럼 말이야!'라고 풀어서 말해줬으면 바로 실행했을 텐데 저 말을 듣고 난데없이 노란색 귀여운 오리만을 떠올려버린 나는 순식간에 파도의 발갈퀴 부분에 내 두 발이 감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파도는 내 발목을 낚아채 거꾸로 후욱~들어올렸다 드럼세탁기 속으로 패대기쳤다. 빠져나갈 재간이 없었다. 몸을 앞으로 웅크린 자세도 아니고 뒤로 뺑뺑 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망상인지 생각인지가 굴러갔다:
'최근에 백밴딩(후굴 자세) 열심히 해 놓길 잘했어. 역시 사람이 평소에 운동을 해야 안 다쳐. 나는 안 다칠 거야. 귀랑 콧구멍이랑 입에서 왜 불이 나는 것 같지? 모래야? 귓구멍에 정말 불이 났나 봐. 괜찮아. 조금은 다치려나? 몰라. 나는 크게 다치지 않고 잘 착지할 거야.'
그 찰나 목뼈에서 큰 소리가 났다.
"뿌지직!"
많고 많은 신체 부위 중 하필 턱으로 착지한 것이다. 턱으로 바닥을 찍으며 온몸으로 나이키 로고를 그리는 상상을 해 보시길. 그 뿌지직 소리가 물속에서 내 귀에 정말 크게 들려서 나는 그 짧은 찰나에
'이제 나는 걸을 수 없겠구나.
그동안 고마웠다 다리야.' 하며
다리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기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과 코에서 피가 흘렀고 턱에 상처가 있었다. 귀도 굉장히 따가웠는데 피는 나지 않았다. 몽롱한 가운데 귀에 피가 나지 않은 게 정말 감사했다. 나는 음악을 물처럼 좋아하므로.
나는 안다. 보통의 미국인이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저 상황에서 가장 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이 남편이 외친 말임을. 그러나 너의 간명은 나의 간명이 아니기에 상상력 풍부한 자에게 'duck'이라는 말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회로로 뻗어나간다는 것을.
물3
"골골골골~ 꽈악 꽈악!"
큰 물통을 거꾸로 꽂아 쓰는 정수기 물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내 귀엔 매번 저렇게 들린다.
"물을 그렇게 마셔서 날씬한가 봐... 나도 물 먹고 싶은데 안 먹혀. 어쩜 그렇게 물을 잘 마셔?"
"예에? 그냥 마시면 되지 잘 마시는 게 어딨어(웃음)... 그냥 마셔요!"
작년까지 몸 담았던 마지막 직장에서 정수기 하나를 두 명이서 같이 썼는데 아날로그 감성이 아직 많이 살아있는 미국엔 물통을 거꾸로 꽂아 쓰는 형태의 정수기가 아직 많다. 그 물통의 물은 내가 일주일 휴가라도 내는 날이면 단 1 인치도 줄어들지 않았고, 평소 교체 주기는 3-4 일에 한 번 꼴이었다.
나는 물을 많이 마셔서 날씬한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빼빼 마른 사람이다. 니맛 내맛 아닌 맛을 사랑하는데 그 맛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 물맛이라 가끔은 배고플 때도 그냥 미지근한 물을 마실 때가 있다.
내가 살면서 마셔본 물 중에 최고는 크로아티아에서 자주 마셨던 야나(Jana).
최악은 없다.
물4.
모든 물과 물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중 2 때 도덕책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가 아마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