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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안 가는 여자

무형의 짐

by ACCIGRAPHY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

어느 날 갑자기 짐스럽게 다가왔다.


그 짐은 내 인생의 특정 지점 까지는 짐이 아니었다. 삼십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내 외양을 신경 써야 - 사회적 드레스코드에 맞게 개성은 최소화하고 트렌드에 맞춰야 - 생존에 유리했기에 미용실 가기는 필요한 무언가였다.


삼십 중반에 내 작업실을 오픈하면서부터는 겉모습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나는 항상 신경을 썼다. 사회적 기준에 합당한 룩을 더 이상 연출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그 지점의 도래가 짐스러움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내가 다녔던 모든 미용실에 감사를 표했고 이제 안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미용실 가는 행위의 짐스러움 사건 후 혹시라도 내가 다른 쓸데없는 짐을 지고 사는 건 아닌지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한 사물이나 사건을 대할 때 하던 방법 만을 고수하면 짐이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산책도 매일 다른 길로 다니는데 이럴 때마다 내 몸뿐 아니라 마음의 길도 다양하게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짐은 줄고 기쁨은 늘었다.




그래서

이 짐을 날려버리는 의식을 해야겠기에

마침 머리 길이도 거지존에 도달했기에

나는 가위를 들었다.


혼자 거울을 보고 슥슥 머리를 잘라봤다.


슥슥슥슥

나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신중한 편이고 결심하면 파죽지세적 경향이 있어서 가위를 잡기로 한 순간 무념무상으로 쳐내려 가기 시작했고 약 5분 뒤 다 된 것 같아 거울을 이리저리 자세히 봤다.


이상했다.

마치 집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남편을 급히 불렀다.


놀라서 달려온 남편은 내 머리를 보고 표정관리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입가에 경련인지 미소인지를 머금은 채 내 머리를 구제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역마살이 심해(?!) 한 자세로 오래 못 있는 나는 남편한테 10초에 한 번씩 '가만있으라'며 혼이 나야 했다.


나는 들이쉬고 내쉬며 '나 죽었소' 하고 꾹 참았다. 가만히 있는 것도 고통스러워 탐진치 대잔치가 벌어지는 내 존재에 깊이 실망하며 호흡에 더 집중하던 찰나,


남편이 다 됐다고 거울을 보란다.

이상한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미용실 다녀온 여자가 서있다. 남편은 고등학생 때부터 스스로 머리를 잘랐는데 같이 놀던 일본 친구들이 다 그러고 살아서 자기도 그냥 그렇게 컸단다.


이런 식으로 내 머리 내가 자르고 남편이 마무리 작업한 지 올해로 삼 년이 넘었다. 이 머리 저 머리 다 해봤는데 그냥 똑단발이 제일 잘 어울리는 두상이라 별로 신경 쓸 게 없다.




나는 남편과 결혼 전 데이트하던 시절에 남편이 귤 까는 모습을 보고 헤어질 결심을 했던 적이 있다. 귤 까는 방식이 과도하게 치밀하고 자연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이었는데 일단 귤의 옆구리를(세상에...) 검지로 살짝 찌른 다음 검지만을 계속 사용하여 주욱~ 한 바퀴 돌려 시작점까지 까면 귤의 옆구리가 휑해진다. 이 상태에서 윗 뚜껑 아랫 뚜껑을 따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귤을 까고 지나간 자리엔 껍질로 한글 '응' 자를 만들 수 있었다.


프로파일러의 범인 분석 수첩에서나 적혀있을 법한 귤 까는 방식이었다. 나는 남편이 귤 까는 방식처럼 결혼생활을 하리라 상상의 내래를 펼쳤고 며칠간 연락하지 않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십 년 살아보니 그게 남편이 하는 짓 중 가장 이상한 짓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요즘은

나도 그렇게 귤을 깐다.


또 바뀔 것이다.




You are under no obligation to be the same person five minutes ago.


당신은 5분 전의 당신으로 살아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다.


앨런 왓츠(Alan Watts, 영국 저술가)의 말.

또 무슨 짐을 들고 있나 살펴볼 때

한 번씩 떠올려 본다.




남편이 귤 까면 생기는 '응'. 혹시나 내 설명이 부족했을까 걱정되어 하나 까 보았다. 엊그제 산 귤인데 껍질이 두꺼워 세밀한 표현을 위해 칼을 사용했다.


남편의 귤 껍질 (styx_procreate) 2000px X 1000px, ACCI CALLIGRAPH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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