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말(本末)
이왕 인간으로 태어난 김에 인간 최고 버전으로 살아보고 싶다면 매사에 본말(本末)을 구분하는 게 기본이야. 이건 우리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건데 정말 현실적 문제들을 쳐내는데 너무 큰 도움이 됐거든. 본말은 나무 모양에서 나왔는데 나무 밑에 작대기를 그으면 본(本)이고, 나무 위에 작대기를 그으면 말(末)이야. 뿌리가 끄트머리에 우선한다는 걸 저렇게 표현했는데 정말 너무 직관적이지! 나는 직관적 가르침에 환장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이 입을 딱 다물게 만들어. 나는 그런 게 재밌어. 삶에 있어 재미는 너무 중요한 덕목이니까.
내가 가끔 선생님께 엉뚱한 질문을 하는 이유도 사실 본말 구분을 잘하고 싶어서인데, 워낙 내가 이쪽 방면으로 타고난 게 없다 보니 맨날 꾸중 듣는 일이 많아. 선생님 말로는 내 질문 자체가 글러먹었데. 역정 내시는 모습마저 사랑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가끔은 상처받아. 나는 오직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거든. 가끔은 내가 선생님 따라다니는 게 내 갈 길이 맞나 싶고,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선생님 수레나 잘 끌어드리는 게 내 할 도리인가 싶어. 그치만 또 선생님이 나 못 알아먹을까 봐 이렇게 저렇게 온갖 방법 동원해서 설명해 주시는 모습 보면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왜냐면 나도 선생님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거든.
나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회(顔回)나 증자(曾子) 같은 사람들만 가르치면 긴장감이 풀리실 것 같고, 나 같은 사람도 만나봐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전적으로 골고루 연습할 수 있으실 것 같아서 계속 따라다닐 예정이야. 가끔 나한테 화내실 때 보면 인의예지가 어그러져 있는 모습이 보이거든. 선생님 따라다닌 세월이 있으니 그 정도는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실 요즘은 일거리가 많아서 선생님 자주 못 뵙고 몸도 안 좋아져서 좀 힘들었어. 돈은 많이 들어와서 마음 한편에 큰 위안이 되고 기뻤는데, 하루는 땅바닥을 보면서 수레를 끄는 내 두 발이 쉼 없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아! 내가 또 본과 말의 자리를 바꿔버렸구나! 덕(德)이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라고 하셨는데 입에 풀칠하고도 남을 돈이 있으면서도 내 몸과 정신의 힘을 아무 생각 없이 돈 버는데만 계속 쓰고 있구나!' 그리고는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모든 것들을 상기하며 다시 공부했어. 그러다 보면 본말이 다시 잘 보이거든.
매사 본말을 따지는 건 그냥 한마디로 하면 우주적 차원에서 내 인생을 놓고 남을 장사를 하는 일이야. 나는 설명할 방도는 없지만 내가 죽어도 또 태어날 것 같거든? - 언젠가 선생님한테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지금 생이나 잘 살라고 하시긴 했지만 - 그래서 내가 다음 생에도 가지고 갈 수 있는, 내 영혼에 각인되는 무언가에 투자하는 게 남는 장사잖아. 내가 선근(善根)은 없어도 셈은 잘해서 다행이야.
선생님께서 우리가 본말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명명덕(明明德)'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어. 인간 안에는 광명하게 빛나는 '명덕(明德)'이라는 게 있는데 그 밝음은 하늘로부터 얻었고 잠시도 빛을 잃은 적이 없데. 근데 그게 내가 타고난 기품이나 탐진치(貪瞋癡) 같은 것에 가려서 온전히 빛나기가 어렵다는 거야. 그래서 매일 더러워진 거울을 닦듯이 우리 안의 명덕을 있는 그대로 밝히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그게 명명덕이야.
명덕은 영원하고 광명한 빛인데 그 빛줄기들의 갈래를 보면 결국 인의예지라고 하셨어.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인의예지를 잘 발현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큰길이지! 명명덕을 잘하고 사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도 광명하게 하는데, 마하리쉬 같은 사람 근처에 가면 참나가 각성되거나, 예수님 근처에 가면 성령의 은사를 입었던 것과 비슷해.
물(物)에는 본말이 있다고 했으니 인의예지에도 본과 말이 있겠지? 물은 물리적 사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이라고 하셨거든(나는 정말이지 이런 말이 너무 좋아). 일상적 선택부터 죽음과 삶에 이르기까지 정말 모든 것들 말이야. 다 따져봐야 되는 거야 뭐가 중한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인의예지 중에서도 인(仁)이 본이고 예(禮) 같은 건 말인 것 같아서 나는 인을 우선시하다 보면 나머지는 따라올 거라 생각해. 인은 사랑이잖아. 쇼펜하우어 같은 고약한 사람도 연민을 중시했고, 예수님 가르침도 한마디로 하면 '서로 사랑하라'인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사랑꾼으로 사는 게 인간 최고 버전으로 사는 거구나 깨닫고 오늘도 열심히 선생님 수레 끌어드리고, 책 보고, 명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어. 이렇게 사는 게 나의 명명덕이거든. 내 자리가 나에게 주어진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내 자리에서 명명덕 하다가 갈 거야. 또 모르지, 다음 생엔 안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