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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Sep 11. 2024

바람




남편 친구 중에 심드렁한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부인은 다정하다. 그들은 슬하에 심드렁한 아들 하나, 다정한 딸 하나를 두었다. 참고로 심드렁 친구의 부모님도 아버지 심드렁, 어머니 다정. 엊그제 오랜만에 여섯이 선셋비치에서 만나 노는데,


남편이 친구랑 모래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친구는 얼기설기 대충, 남편은 온통 진지한 얼굴이라 '이 사람은 모래성마저 진지하게 짓는구나...' 생각하던 중 파도가 덮쳤다. 친구 벽은 한방에 사라졌고 남편 벽은 건재했다. 먼발치에 엎드려 누워 물끄러미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친구 부인과 나는 조용히 각자의 이유로 '풉-' 한번 웃고 하늘 보고 돌아 누웠다.


태양이 맹렬했으나 바람도 강렬해서 피부가 얼마나 꿉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심드렁 친구가 갑자기 연날리기를 하자며, 커다란 천 뭉탱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성인 남성 둘이 이리저리 달리기하며 띄워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택도 없었다.


혼자 몰래 연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채, 유유자적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보니, 우리가 있던 자리에 대왕문어 한 마리가 우아하게 날고 있었다.


"한번 잡아볼래?"


심드렁하게 건넨 연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바람이 팽팽한 실을 타고 내 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한없이 무겁기도, 가볍기도 하였다. 아니, 무게라기보다는 리듬만 있었다. 바람의 심장이 내 몸으로 옮겨와 뛰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맞춰 숨을 쉬었다.


숨 쉬는 방식은 사는 방식과 비슷하다. 몸이 찌뿌둥하거나 묘하게 기분이 안 좋을 때, 나는 찌뿌둥하게 숨 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고요하고 긴 호흡이 이어질 때 나는 몸과 마음을 널따랗게 펼쳐놓고 유연하게 살고 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폐활량이 증가했다. 첫 달엔 신나서 막 달리다 석 달이 지나자 습관이 되었다. 내 인생이 왜 지금 내 몸에 달리기를 장착시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장착해 본다. 재밌다. 하고 많은 것 중에 '무언가'가 재밌다는 건 신성한 사건이다.


살면서 이렇게 달려본 적이 처음인데 몸에 무리가 오지 않은 이유는 지난 2년 간 오래 걸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잘 달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다. 오늘은 3분밖에 달리지 않았다. 요즘 우리 동네가 연일 섭씨 40도를 웃돌아서 사실 달리기 자체를 하면 안 되는 날씨지만, 이제 안 하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 때문에 모른 척할 도리가 없다.


먹물이 젖다 마르다를 반복하다가 벼루 안에서 융기가 일어났다.


자기 전에 벼루에 먹물을 가득 부어놓고 다음날 쓸 붓을 담가놓고 잔다. 마른 붓을 매일 아침 적셔도 되지만, 밤새 적셔져 있던 붓에는 나는 알 수 없는 붓만의 사정, 긴 호흡으로 ‘쿡-’ 찍혀 있던 붓의 날숨이 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이불 정리도 안 하고 날숨 구경하러 간다. 참고로 이불정리는 원래 안 한다. 아침에 그런 진 빠지는 동작을 하는 건 아침에 대한 불경(blasphem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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