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89] 《Bleach》 파트1

by 김성대
《Bleach》는 내가 들은 록 앨범들 중 최고다.

크리스 코넬
너바나는 개러지 그런지, 얼터너티브 노이즈, 지옥 같은 헤비메탈을 모두 받아들이되 이중 어느 것에도 온전히 속하진 않는다.

작가 질리언 G. 가르가 『더 로켓』에 기고한 《Bleach》 리뷰 중


하드 록부터 사이키델릭 커버, 슬러지 펑크까지 다양한 분위기를 뿜어냈던 첫 번째 앨범에서 너바나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했다.

닉 소울스비Nick Soulsby (너바나 구술 역사책 『I Found My Friends』 저자)

《Bleach》 표지 사진은 트레이시 머랜더가 찍은 것이다. 사진에 제이슨이 있어 나는 처음 너바나가 4인조인 줄 알았다.


애초 서브 팝은 너바나 데뷔를 EP로 치르려 했다. 반면 밴드는 꽉 찬 앨범을 원했다. 너바나는 <Love Buzz>, <Scoff>, <About a Girl>, <Big Long Now>, <Immigrant Song>레드 제플린 커버, <Spank Thru>, <Hairspray Queen>, <School>, <Mr. Moustache>를 갖고 크리스의 모친 미용실 건물에서 리허설을 했다. 리허설은 미용실이 문을 닫는 저녁 8시에 시작해 자정 무렵 중국 음식 따위로 배를 채운 뒤 새벽까지 이어졌다. 찰스 R. 크로스가 쓴 커트 코베인 평전을 보면 이 시절 리허설을 위해 크리스가 커트와 채드를 밴에 태워 장거리 운전을 했다고 나와 있지만, 커트가 승인한 아제라드의 너바나 전기에 따르면 당시 운전을 한 사람은 채드였다. 채드는 2, 3주 동안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서 터코마까지 가 크리스를 데려오거나, 올림피아에서 커트를 픽업해왔다. 그때 이들이 밴에서 줄곧 들은 카세트테이프 한 쪽 면엔 스위스 헤비메탈 밴드 켈틱 프로스트Celtic Frost가, 반대쪽엔 미국 파워팝 밴드 스미더린스The Smithereens가 녹음돼있었다. 채드의 기억엔 머드허니, 태드, 코핀 브레이크Coffin Break, 픽시스, 슈가큐브스The Sugarcubes도 들었다고 한다. 밴드는 합주실에서 몇 시간 연습하곤 해변을 걷거나 급수탑Water Tower 전망대를 찾아 머리를 식혔다.


커트는 89년 새해 첫날을 트레이시와 함께 맞으려 올림피아로 갔다. 5일 뒤엔 포틀랜드 클럽 사티리콘Satyricon에서 공연했는데, 이는 워싱턴 주를 벗어나 처음 치른 너바나 공연이었다. 1월의 나머지 시간은 데뷔 앨범 작업에 골몰했다. 이 시기 스튜디오로 가는 차 조수석에 앉은 커트는 대시보드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서둘러 노랫말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또는 세션 전날 묵은 제이슨 에버맨의 집에서 거의 쓰지 않은 가사를 완성하느라 밤을 샜다는 말도 있다.


89년 초 밴드가 직접 만든 너바나 언론 보도자료.jpg
89년 초 커트가 쓴 가사(왼쪽)와 밴드가 직접 만든 너바나 언론 보도자료.


아직 제목을 정하지 않은 너바나 데뷔 앨범은 처음엔 녹음 순서대로 편집됐다. 이에 브루스는 앨범을 완전히 다시 만들 것을 주문했고, 컨디션이 바닥이었던 멤버들은 피어스 카운티Pierce County 보건 기관에서 처방 받은 코데인Codeine 시럽을 먹어가며 레이블 대표의 요청에 응했다. 녹음 비용은 600달러라 적은 앨범 속 정보와 달리, 엔디노가 30시간 분량 제작비로 606달러 17센트를 불렀다. 그나마 <Love Buzz>와 <Big Cheese>, 《서브 팝 200》에 수록한 <Spank Thru>, 2004년 박스 세트 《With the Lights Out》에 들어갈 <Blandest>는 빼고 셈한 액수였다. 멤버들은 이런 헐값에 녹음한 데 자부심을 느꼈다. 문제는 누구에게도 그 ‘헐값’이 없었다는 것. 결국 계산은 그때만 해도 외부인이었던 제이슨 에버맨이 일시불로 했다.제이슨은 데일 크로버에게 받은 너바나 데모 테이프를 듣고 밴드에 호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너바나는 알래스카 고기잡이로 번 돈을 기꺼이 친구채드 채닝 앨범 녹음 비용으로 쾌척한 미담을 기리는 차원에서 제이슨의 이름을 앨범 크레디트와 재킷 사진에 남겼다. 다만, 앨범에서 그의 연주는 들을 수 없다. “《Bleach》라는 매우 멋진 앨범 작업은 내 밴드 인생에서 딱 한 번만 일어날 일이었다.” 채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커트가 언제 함께 연주하자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에버그린 주립대학 K기숙사 파티에서 처음 같이 연주한 적이 있어요. 그 파티가 끝나고 커트가 ‘우리 밴드에 들어올래?’ 하고 물었죠.

제이슨 에버맨


커트는 그때까지만 해도 기타 연주와 노래를 동시에 해본 경험이 적었다. 밴드 연주도 고작 1년 반째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해야 했던 투어는 커트에겐 부담이었다. 어느 날 커트는 제이슨에게 “사운드를 더 두텁게 만들기 위한 세컨드 기타리스트 영입”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커트 입장에선 홀로 리듬을 유지하려 애쓸 일도 없거니와, 설령 실수해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게 된다. 한마디로 노래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커트는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따로 고민했던 벤 셰퍼드(사운드가든)와 다이노소어 주니어의 J 매시스J Mascis 대신 제이슨을 최종 택한다. “우린 기타를 잘 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제이슨은 자신이 기타를 연주하고, 오디션도 한 번 본 적 있다고 했죠. 녀석은 충분히 좋은 사람 같았고, 무엇보다 긴 ‘서브 팝 헤어스타일’도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제이슨은 커트의 고향인 애버딘에 살았을뿐더러, 너바나의 세 멤버처럼 어두운 가정환경도 겪은 인물이었다. 제이슨은 어지간히 너바나와 함께 하고 싶었는지 지난 수년간 펑크 록에 빠져 있었다고까지 말했지만, 커트가 살펴본 그의 소장 앨범들은 대부분 스피드 메탈 계열이었다.


1989년 너바나 라인업. 오른쪽 '서브 팝 헤어스타일'을 한 이가 제이슨 에버맨이다.


애초 커트는 데뷔 앨범 제목으로 ‘Too Many Humans’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Bleach’로 바뀐 건 89년 2월 초에 돈 짧은 캘리포니아 투어 때였다. 하이트-애쉬베리Haight-Ashbury 무료 진료소에서 감기를 떨쳐낸 뒤 밴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니던 밴드와 서브 팝 대표 둘은 시내 곳곳에 붙어 있던 에이즈 예방 포스터가 헤로인 중독자들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만난다.


약에 취하기 전에 바늘을 표백해 쓰시오.
(Bleach your works before you get stoned.)


찰스 R. 크로스의 책에선 저 포스터를 본 커트가 “‘Bleach’. 저게 우리 앨범 제목이 될 거야” 하고 크리스와 채드에게 말했다 나와 있지만, 정황상 차에 함께 탄 경영진들과 논의 끝에 나온 제목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저 짧고 강렬한 단어는 커트의 목소리를 “표백된 울부짖음(Bleached Wails)”으로 표현한 89년 3월 18일자 『멜로디 메이커』 기사에도 반영된다.


너바나는 캘리포니아 투어를 거치며 실력이 눈에 띄게 는다. 밴드는 일정을 끝내고 돌아와 보그, 워싱턴 대학의 허브 볼룸HUB Ballroom, 안넥스 극장Annex Theater 무대에 섰다. 관객들은 <Blew>가 흐를 때 커트를 자신들 머리 위로 받들며 열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테이지 다이빙은 마크 암만이 누린 영광이었다. 조나단은 이 시기를 너바나의 이정표로 기억했다. 반면, 워싱턴 주의 한적한 소도시인 엘렌스버그Ellensburg 커뮤니티 센터에서 너바나 공연을 본 스티브 피스크Steve Fisk, 사운드가든과 비트 해프닝, 스크리밍 트리스 앨범의 프로듀서는 엉망인 PA 시스템과 기타 줄을 끊어먹는 커트를 보고는 첫 곡 때 현장을 떠나버렸다. 역시 어떤 공연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는 법이다.


89년 봄. 너바나는 에버그린 주립 대학에서 녹음 세션을 했다. 엔지니어는 그렉 베이비어Greg Babior. 세트리스트는 키스 트리뷰트 앨범 《Hard to Believe》에 싣는 <Do You Love Me>와 나중 너바나의 대표곡이 되는 <Dive>였다. 커트는 새미 헤이거, 키스, 보스턴 같은, 자신이 10대 때 한창 인기 있던 밴드들을 모두 별로라고 했지만 키스는 직접 커버했고, 보스턴은 너바나의 가장 유명한 곡에서 간접으로 응용했다.


1989년 6월 무어 극장에서 치른 '레임 페스트' 포스터. 당시 서브 팝 간판 밴드들인 머드허니, 너바나, 태드가 함께 무대에 올랐다.


6월 9일, 시애틀 무어 극장Moore Theatre에서 서브 팝 레임 페스트Lame Fest가 열린다. “시애틀에서 가장 형편없는 밴드들이 펼친 땀과 광기의 하룻밤 난교”로 묘사된 레임 페스트는 시애틀을 전 세계에 알린 최초 공연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지역 밴드가 동원할 수 있는 관중 수를 200명에서 1500명으로 늘리는데 물꼬를 튼 밴드로 간주된 머드허니를 중심으로 서브 팝의 가장 촉망 받던 두 밴드 태드와 너바나가 오프닝 무대에 섰다. 너바나 입장에서 이 공연은 6일 뒤 나올 《Bleach》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공연은 “스테이지 다이버들과 과열된 보안 요원들 사이 전투”로 뜨거웠는데, 머드허니 공연 중 밴드가 보안 요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 차례나 연주를 멈춰야 했을 정도였다. 마이클 아제라드는 레임 페스트를 “시애틀의 열기가 폭발한 시점”으로 평가했고, 『백래시』는 따로 너바나에 주목해 “그런지 안에서 멜로디를 많이 활용하는 밴드”라며 “그들의 공연은 완전히 강렬하다”고 썼다. 아제라드의 말처럼 서브 팝 소속 밴드들은 이때부터 수십 명 클럽 관객을 넘어 수백 명 관객을 대상으로 정기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너바나는 다음 날 시애틀 록 밴드 캣 버트Cat Butt가 펑크 낸 공연에도 대타로 섰다. 유료 관객은 캣 버트의 팬들인 12명. 커트와 멤버들은 여기서 키스 커버곡 <Do You Love Me>를 연주했다.


커트는 자신이 10대 때 핫했던 키스에 시큰둥해 하면서도 <Do You Love Me>만은 커버했다.


당시 인디 레이블들은 서류 대신 악수로 아티스트와 계약했어요. 내 경우엔 계약서를 믿지 않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죠. “대체 뭐야? 왜 우리가 (너바나와) 세 장짜리 음반 계약을 맺는 거지?” 돌이켜보면 그 계약 덕분에 서브 팝은 계속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가 집까지 찾아와 날 혼내준 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어요.

브루스 파빗


이 무렵 너바나는 서브 팝과 정식 계약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커트는 계약서에 한 서명을 반대로 계약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근거로 삼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89년 가을, 커트는 도서관에서 도널드 패스맨Donald Passman이 쓴 『음악 비즈니스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읽고 파빗의 보헤미안적인 태도를 의심했다. 실제 당시 서브 팝과 계약다운 계약을 한 밴드는 사운드가든 정도 밖엔 없었다. 언더그라운드 작가 겸 퍼포머였던 스티븐 제시 번스타인은 서브 팝에 계약서를 요구한 최초 인물로 남아 있다. 때는 아직 조나단이 『This Business of Music』을 읽으며 레이블 표준 계약서에 관한 팁을 얻고 있던 과정이었다. 조나단은 아직 관련 초안도 작성하기 전이었다.


서브 팝에게도 너바나에게도 처음이었던 레이블 표준 계약서(왼쪽). 오른쪽은 계약서에 남긴 채드, 크리스, 제이슨, 커트의 자필 서명.


총대를 멘 건 크리스였다. 파빗에 따르면, 언젠가 자신이 연 ‘와일드 디스코 파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때 술에 취한 크리스가 그의 집으로 걸어와 창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이 개X식들아, 계약을 원해!” 파빗은 《Nevermind》라는 괴물 앨범을 생각해볼 때 크리스의 저 행동이 서브 팝을 구해준 “신의 섭리”였다고 술회했다. 흥분한 크리스와 4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브루스는 조나단에게 전화를 걸어 너바나가 정식 계약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표준 계약 팁을 습득 중이던 조나단은 밤새 문서를 타이핑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것은 “음악 비즈니스 책에서 중요해 보이는 부분을 복사해 ‘여기 계약서요’라고 말한” 것이었다. 자비없는 혹자는 그것이 “변호사도 없는 10센트짜리 사기 계약서”라고도 했다.


89년 6월 3일. 채드 채닝, 크리스 노보셀릭, 제이슨 에버맨, 커트 코베인이 서명한 서브 팝과 너바나의 이 계약은 밴드의 첫 법적 계약이었을뿐더러, 서브 팝의 첫 번째 정식 서류 계약이기도 했다. 계약서는 89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해 이후 3년간 앨범 세 장을 낸다고 명시, 계약 첫해엔 6천 달러를, 다음 해에는 12,000달러를, 세 번째 해엔 18,000달러를 레이블이 밴드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얄궂게도 계약 내용이 가리킨 세 장은 우리에게 남을 너바나 정규작 전부를 합친 숫자였다. 거기엔 레이블을 구원해줄 메가 히트 앨범 《Nevermind》도 포함됐다. 저 계약서가 없었다면, 서브 팝은 90년대 초에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

keyword
이전 21화너바나의 시작, <Love Bu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