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블루스가 '듣는' 게 아닌 '잡는혹은 당기는' 것인 줄 알았다.
카바레에 드나들던 어른들은 그걸 '부르스'라고 불렀다.
한창 주현미의 <눈물의 부르스>가 유행하던 때라,
난 영문도 모른 채 블루스를 부르스라 여기며 컸다.
내가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게 된 건 다수 블루스 팬들이 겪었을 과정과 비슷하다.
비비 킹, 앨버트 킹, 프레디 킹을 듣고서다.
정확히는 일렉트릭 블루스 기타 연주를 좋아하게 된 건데,
저 '쓰리 킹'은 10대 때 내 머릿속을 지배한 '부르스'라는 오해를
찌릿 짜릿한 발군의 연주들로 마치 없던 일처럼 걷어내 주었다.
《In Session》은 셋 중 앨버트 킹이 1983년 캐나다 온타리오의 해밀턴에서
과거 자신이 '리틀 스티비'라 불렀던 스티비 레이 본이 젊은 거물이 되고 난 뒤 만나
기탄없는 협연을 펼친 기록이다.
이들 연주를 듣다 보면 내가 블루스를 왜 좋아하는지 새삼 알게 된다.
일단 블루스엔 사람 냄새가 난다.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 블루스엔 그래서 가식과 위선이 없다.
또 곡 구성이나 연주를 대화, 즉흥 위주로 가져가는 것도 마음에 든다.
인간적인 록과 각본 없는 재즈를 즐기는 것도 어쩌면 저런 블루스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특히 일렉트릭 블루스를 두 기타리스트가 협연할 땐
주고 받기give and take 연주가 겹으로 이뤄지는데
한 번은 기타와 자신 사이, 그러니까 연주와 노래 사이에,
다른 한 번은 내 기타와 상대 기타 간에 오간다.
앨버트와 스티비는 이 공연 내내 그걸 자유자재로 해내고 있다.
흠모해 온 대선배 스타일을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언어로 맞서는
스티비의 흥분 반 긴장 반 연주는, 존재만으로도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베테랑 앨버트의
뜨거운 여유와 만나 듣는 사람을 차분한 흥분으로 이끈다.
더할 수 없이 훈훈해 보이는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은 중간중간 옛날 얘기도 하고,
스티비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영웅이 하는 말에 아이처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이날 스티비의 기분은 모르긴 해도 앨런 아이버슨이 마이클 조던을,
리오넬 메시가 디에고 마라도나를 마주한 설렘에 가깝지 않았을까.
최소한 찰리 크리스천처럼 되고 싶었다던 조지 벤슨의 마음이었을 거다.
마틴 루터 킹은 블루스를 "역경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이날 저 두 레전드가 엮어낸 블루스는 그 역경을 옷 먼지 털듯 말끔히 떨어낸다.
AC/DC의 《Back in Black》, 팻 메스니와 찰리 헤이든의 《Beyond the Missouri Sky (Short Stories)》 만큼이나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