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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목 Oct 31. 2022

허망한 상실 가운데 당사자와 주변인이 해야 할 것은?

상실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 어떻게 해야 할까?

허망한 슬픔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상실은 어렵고, 아프고, 치명적으로 삶을 위협한다.


때론 원인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중요한데,

상실 앞에서 특히 그렇다.


1. 당사자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내 슬픔이 가족들의 속상함으로 이어질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연기했다. 밝고 긍정적인 아이가 되려 했다. 원래 민감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가장 끼 많고 유쾌한 아이가 됐다. 겉으로는.


생존을 위해 슬픔을 외면하고 회피했는데, 그건 정서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택했던 밝고 유쾌한 가면은 순간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후에 조울증처럼 스스로를 괴롭히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거짓된 밝음, 억지 긍정이 만든 공허함은 애정결핍처럼 언제나 외로움에 몸부림치게 만들었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갖추기 어렵게 만들었다. 얼마 전 쓴 글처럼 아직도 그 상실감 때문에 공황이 생길 정도로 상실은 익숙해 지지도, 저절로 다뤄지지도 않을 정도로 아프다.


감정은 당연한 것이다. 흘러가게끔 해 줘야 했다. 마주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수십 년이 지난다 해도 정리되지 않는다. 외면하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채 드러나지 않은 감정은 곪기 마련이다.


돌아보면 충분히 울어도 된다는, 슬퍼해도 된다는 안정감이 필요했다. 그게 없었던 것 같다.

세상 그 자체, 산소와도 같은 엄마를 잃었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건 문제가 있었다.  


나름 내적인 힘이 있는 아이, 타고난 긍정성이 있었으니 잘 견뎌낸 것도 같다. 그래서 더 아쉽다. 한 번 크게 엉엉 울 수 있었더라면 금방 회복하고 더 잘 지냈을 텐데 하는 마음에서.



2. 도와주고 싶다면  그 슬픔 가운데에 함께 해 주길 바란다.


비단 아이뿐이랴. 우리 삶에서 소중한 존재를 잃으면 그 상실감을 감당하는 것은 언제든 어렵다.

허망한 상실을 그 누가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 도움이 필요하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이가 주변에 있다면 슬픔을 마주하게 도와주고, 울어도 된다는 안정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주기 바란다. 떠난 이를 생각해도 된다고 말해주기 바란다. 외면한다고, 숨긴다고 해결될 상실이 아니다.


혼자 두지 않아야 한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 내면에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을 수 있다. 굳이 말을 걸거나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홀로 방치하지만 않으면 된다. 울면 위로해 주거나 함께 울면 되고, 떠난 이를 추억하고 싶어 한다면 함께 추억하면 된다. 그저 함께 있어주고, 함께 슬퍼해 주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에겐 상실을 이겨낼 힘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만 든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긍정으로 바꿔 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함께' 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무너지지 않는다.


당사자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위로를 원한다면 그저 그 슬픔 가운데에 함께 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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