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소설 #시나리오 #논픽션
- 체코, 알베르트의 군수공장, 1940
이윽고 어둠이 온 거리를 뒤덮었다. 지금은 안전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번에도 적발된다면 아무리 형이 손을 써 준다 해도 위험할 수 있다.
나치의 광기가 점점 극심해지고 있다.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행위도 모자라 민족주의에 의한 유대인 학살까지. 온 국민도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 상황이 두렵다.
허나,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분명 잘못된 길로 가고 있고, 누군가는 그걸 막아야만 하니까.
내게 모든 것을 바꿀 대단한 힘은 없지만, 미력한 내 능력으로도 귀중한 생명 몇몇은 구할 수는 있다.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의 탈출을 위한 여권을 가지고 오기로 한 뮐러는 아직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순간, 철문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기척을 줄이고 걷는 소리.
뮐러일까? 아니다.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야!
어떻게 하지? 만일 게슈타포라면?
- 오스트리아, 빈, 1938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점심 즘. 나는 오랜만에 빈에 들러 친구와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햇살이 참 좋군. 나치는 점점 미쳐 돌아가지만, 이 빈의 아름다운 거리는 여전히 봄과 참 잘 어울리지.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쉿! 이 봐 알베르트! 조용히 하게! 이 시대에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미친 사람이라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나치를 욕하다니. 여기 빈이라고 해서 자유롭지 않단 것을 모르나?”
친구가 당황한 듯 내 입을 틀어막고 다그쳤다.
“걱정 말게. 아무리 나치가 미쳤다고 해도 말 한마디 한다고 무슨 일 있겠는가? 게다가 미쳐가는 걸 미쳤다고 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아니, 이 양반아. 지금 분위기를 알면서도 그러나. 총통이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시점이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려고 군을 주둔하고 있질 않나. 뭐가 터져도 금방 터질 것 같은 시기이니 우리도 조심해야 해!”
모처럼 만난 친구의 기분을 더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하고픈 말을 삼켰다. 지금의 나치, 아니 내 조국 독일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친구의 말처럼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치의 지나친 폭력성과 무자비함, 인종을 차별하는 정책은 정상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정권의, 내 조국의 끝은 어디일까.
“모처럼의 여행인데, 어두운 이야기일랑 집어치우고 우리 식사나 하세. 내가 아주 훌륭한 곳을 알아 뒀네. 베를린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을 곳이지.”
친구의 너스레에 조금 기분이 풀어진 나는 빈의 거리를 감상하며 친구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잠시 후,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식료품점에 백발의 노인이 진열대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목에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더러운 유대인-
그녀는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 미친 짓거리를 구경하며 조소와 악의적인 농담을 던지는 사람들도 충격적이었지만, 나를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그 곁에서 "어머니!"하고 울부짖으며 노인에게 다가가려 하다가 매 맞는 청년, 그리고 그 청년을 걷어찬 군화가 더러워지기라도 했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는 금발의 나치 군인과 곁에서 낄낄대는 키 큰 군인의 모습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달려 나간 나를 큰 키의 군인이 붙잡았다. 붙잡힌 팔을 뿌리치며 나는 외쳤다.
“어쩌자고 이런 추악한 짓을 하는 거요!”
눈을 치켜뜨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키 큰 군인을 제지한 금발의 군인. 아마 직책이 좀 더 높은 듯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띈 채, 두 손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제스처로 말했다.
“추악하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는 추악한 행동을 한 것이 없소.”
“사람에게 이런 수모를 안겨주는 게 추악한 일이 아니오? 당장 저 노인의 목의 팻말을 벗게 하시오!”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알려주는 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입니까? 자기 주제도 모르고 더러운 유대인이 대낮에 떡하니 상점에 들락날락 거리는 이 상황이 더 추악한 것 아니오?”
금발 군인은 비릿한 조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당신도 독일인인 것 같은데, 나치의 뜻에 반하는 행위는 반역이나 다름없지. 가던 길이나 그대로 가시오.”
부드럽지만 강압적인 말투,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키 큰 군인은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들 태세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위협감 때문인지 주변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팔을 잡아 끄는 친구의 손길도, 나치 군인들의 오만함과 비 인륜적인 만행도, 주변의 방관과 조소들. 이게 이 시대의 현실이구나.’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이성이 없는 상대에게는 이 방법뿐일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내밀었다. 금발 군인의 손짓에 키 큰 군인이 내 손에서 빼앗듯 신분증을 채 갔다.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금발 군인에게 귓속말을 했다.
“알베르트 괴링. 아, 아니! 괴링이라면! 헤, 헤르만 괴링 공군 총사령관 님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신분증을 건내 받고 읽은 금발 군인은, 사람을 벌레처럼 보던 눈빛과는 다르게,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내 친형이오. 어서 저 노인을 풀어주시오!”
둘은 마치 내가 공군 총사령관인 것 마냥 “예!” 대답하며 곧장 노인에게 "내려와!"라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쓰러져있던 청년이 번개처럼 달려가 노인을 끌어안았다.
“목의 팻말도 벗기고 사과하시오!”
“죄송합니다!”
“나한테가 아니라 저 노인에게!”
그 말에 두 군인은 당황한 듯 눈을 치켜 뜨더니,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간까지 떨리는 걸 보니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치욕감. 사람에게 사과하라는 말이, 이렇게 치욕을 느낄 일인가. 아마 이 군인은 그녀를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거겠지.
“그… 그만하시게. 그들도 충분히 알아 들었을 게야.”
친구의 만류에도 나는 그 둘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그 둘은 자리를 떴고, 주변 인파는 잠깐 웅성거린 후 뿔뿔히 사라졌다. 노모는 아들로 보이는 청년의 품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청년의 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정말 잘못되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인종이라는 것이 무엇인데 저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날의 경험은 내가 본격적으로 반 나치 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이란 이유 하나로 강제로 가두고 고된 노역을 시키며, 끝내는 죽여 버리는,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미친 그 행태에 대해,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맞설 필요가 있었으니까.
- 체코, 알베르트의 군수공장, 1940
끼이익! 오래된 철문이 비명을 지르듯 소음을 내며 열렸다.
낡은 마룻바닥에서 삐끄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씩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나는 숨죽여 웅크리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화에 계속>
이 둘은 형제였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형제간의 우애는 돈독했는지 나치 독일의 제2인자이자 유럽을 호령한 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도 동생이 유대인 구출을 시도하다 곤경에 빠지면 늘 도와주었다고 한다.
전쟁 후에도 동생에게 자신이 죽은 후 남겨질 가족을 부탁한 후 자살했다고 한다. 의외인 사실은 이 형제는 아버지가 다른, 이른바 이부형제였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