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고맙게 생각하자
나는 조직이 나를 얼마나 데리고 있을까? 고민한다. 1993년 야간 전문대를 졸업 후에는 평생 직업이라는 단어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다. 1997년 7월경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에 있었다. 물론 나는 기아자동차 계열사인 건설 부문의 회사에 입사 후 약 3년이 지난 2018년 7월 18일 법원에서 파산선고 후 약 1,600명의 직원은 일괄사표를 썼다. 직원 수가 약 1,600명이 1998년 7월 18일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나의 직장은 IMF의 금융위기 전 흑자도산으로 부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발생, 그리고 법원의 파산선고, 파산 이후 직장의 폐쇄 조치가 되고 법원 파산관재인이 상주하여 법원의 관리와 통제 속에 있었다.
고인이 된 김대중 대통령이 전 국민에게 부탁의 말을 하였다.
1997년 12월 3일은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로부터 자금을 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날이다. 1998년 1월 5일 금 모으기 운동은 약 349만 명이 참여하고 전개하였다. 공영방송의 금을 모으는 장면이 매일 보도 되었고 우리는 IMF를 극복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IMF 금융위기를 헤쳐나갔다. 이 시기에 자영업자, 중소기업 등은 도산한 곳이 많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한 사람일 수 있다. IMF가 절정기인 1998년 당시 나는 1998년 12월 20일경 사업을 시작하였다. 어린 나이에 창업하였다. 자본금은 퇴직금 700만 원으로 시작하였지만, 건물의 보증금과 집기를 구매하고 나서 보니 컴퓨터를 마련할 돈이 없었다. 물론 프린터, 스캐너도 없었지만 친한 후배에게 무상으로 컴퓨터를 임대하게 되어 사무실을 개설할 수 있었다. 프린터와 스캐너의 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복합기는 직장 선배님이 약 100만 원을 창업선물로 주셨다. 38살의 노총각인 그의 별명이 둘리였던 가장 친한 선배가 선물로 준 것이다. 그는 항상 밝은 모습이고 명랑했고 참 착한 사람을 선배를 둔 것도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 후배의 도움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월급을 줄 돈이 없었기에 직원은 구할 수 없었다. 내가 사무실을 창업한 후 며칠이 지나자 직장 친구와 선배들이 하나둘 모였다. 직장이 없던 그들은 ‘함께 해보자!’라고 온 것이다. 나는 고맙게 느껴졌고 항상 감사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설계사무소에 영업하고 소개로 다른 사무실에 방문하고 지인으로부터 일을 수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나에게 찾아와 일을 시작한 그들에게 많은 돈의 급여는 지급하지 못하였지만, 그 당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을 지급하였다. 새로운 올드보이인 우리는 참 열심히 노력하여 수익을 확보하였다. 나는 약 6개월 동안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고 매일 야근과 철야를 하였다. 지금 생각 해보면 참으로 대단하다고 자찬하고 있다. 너무나 가난한 우리는 컵라면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먹고 있지만, 컵라면은 싫어하는 대표 식품으로 전락하였고 김밥도 마찬가지다.
나의 어릴 때를 잠깐 회상해 보았다. 어찌 보면 미친놈일 수도 있다. 난 항상 돈이 없어도 자신 있게 살았던 것 같다. 지갑에 돈이 없다고 울지 않았고 돈은 내가 추구한다고 벌리지 않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따라 다닌다고 벌린 게 아니고 사기꾼만 붙어 다녔다. 서울 양재동에 나의 사무실이 있었다. 서초소방서 옆 골목길 안의 4층 건물이다. 앞에는 소공원으로 되어 있는 장소였고 사무실 앞쪽에 미니공원과 주변에는 다방이 많이 있었다.
주로 그 다방에서 관계자와 미팅을 많이 하였고 설계도면을 들고 와서 현장의 실행금액을 짜고 공사소장을 하라고 제안한 적이 많았다. 나를 미팅한 다 수는 사기꾼이었지만 한 번도 사기도 당해본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소나기를 잘 피해 갈 수 있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사기성의 전문가가 많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이제는 사기꾼이 보이고 아군이 누굴까? 적군이 누굴까? 가 보인다.
우리는 월 500만 원을 벌기 위해서 해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 이상을 지속해서 버는 경우의 사람은 제외하고 평범한 생활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 본다. 직장인의 경력도 대기업을 제외하면 월 수익은 세금공제 후 500만 원을 벌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월 500만 원을 몇 년을 벌어 본 적도 있었고, 건설현장에서 사용승인 후 인센티브를 3,000만 원을 성과보수로 받은 적도 있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고 성과보수는 없다. 나는 1억의 수익을 창출하려고 노력하였다. 돈을 쫓아간 것이 아니라 자격과 경력, 학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노력을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시작은 기능사 자격증부터 약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안정적으로 살고 있으며 또 다른 직업인 전문가로서 전문 경력관을 하고 있다. 나에게는 약 200만 원 정도의 카드빚만 있다. 지난달에 사용하고 일부는 할부로 구매한 금액이다.
당신도 그러한가? 아닐 것이다. 부부가 맞벌이하고 약 1억 이하의 수익을 낼 것이다. 나도 1억 이상일 수도 있고 이하일 수도 있었다. 나는 혼자이지만 노력을 더 할 것이다. 나는 직장을 80살까지 다닐 것이고 아울러 투잡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것이며, 정년 없는 자격증으로 두 발로 걸어 다닐 때까지 벌 수 있고 아마도 재창업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교육 사업으로 전환하여 시민을 대상으로 가르치면서 사려고 한다. 이제는 항상 꿈이 그려지고 앞날을 생각하면 산다. 당신도 1억이라는 연봉을 나보다 더 빨리 벌 수 있다.
몇 년 전 내가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사람의 나이는 약 23살 정도의 젊은이다. 그는 군대 제대 후 기술원에서 약 1년 동안 용접에 대한 기능을 배우고 있으며 기술원에서 수료 후 그의 연봉은 약 5,500만 원이었다. 그 용접기능사는 1년 동안 기술원에서 하나의 기능을 배워서 취업한 사례이다. 이게 사실일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아니고 사실이다. 또한, 이 기술원은 공업계 고등학생과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한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가르치기도 하며 일반인은 주로 단기간에 수료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다양한 기능인을 배출하여 그 학생들에게 우리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주는 곳이다.
호주나 미국의 배관을 다루는 기능사의 연봉은 약 1억5천만 원이라는 보도 사실이 있다. 3D의 직업을 싫어한다. 당신도 영원한 3D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 이상을 추구하여 창업하여 3D를 하려는 구직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시작은 미미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이면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반드시 올 것이다.
내가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고 시작한 것은 건설현장의 일용직으로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일과 철거를 전문으로 하였다. 내가 20대 초반에 건설현장에서 벽돌의 소 운반을 하였는데 층당 운반비는 100원이다. 몇 장을 날라야 12만 원을 가져갈 수 있을까? 이 내용은 내가 실제로 1989년의 일을 하였던 시기의 이야기다. 2000년에는 철근과 거푸집, 형틀, 레미콘 타설 등의 일을 하였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진짜 그게 가능한 거?’ 의문을 가져도 무방하다. 지금은 ‘곰방’이라는 일할 수가 없고 모든 일을 스카이라는 장비 차를 불러서 작업자가 실내에서만 ‘밀바’라는 이동식 도구로서 구내 운반만 하고 있다. 이제는 사람이 하는 일을 건설기계의 힘으로 비용을 들여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현실 세계가 냉혹하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나 3D 직업은 우리 인생에서 잠깐 스쳐 가고 있으니 어렵고 힘들다고 비관하지 마라. 누구에게나 아픔과 시련, 절망은 있을 수 있다. 그런 시련을 지금의 내 아내가 내 곁에서 묵묵히 도와 두었고 슬픔은 소리 없이 금방 지나가고 감동은 우리에게 평생 마음속에서 살아서 춤을 춘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아라!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를? 과연 몇 시간일까?
난 야간 전문대를 1993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 건설회사에서 펜과 컴퓨터만 다루는 사람이었고 평생교육원, 석사, 박사과정도 모두 야간에 수업을 받았다.
힘들다고 사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고맙게 받아들이고 배우자 자녀, 부모님을 생각하면 힘이 날 것이며 1억이라는 돈이 단기에 들어올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