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고 자랑스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지만, 이틀 후에는 다시 "상의 의미를 신중히 생각한 끝에 사양할 수밖에 없으니 저의 결정을 이해 바란다"고 했다.
최고 권위의 노벨상을 두고 이런 해프닝을 벌였던 이는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후르시초프의 공포정치가 서방세계와 대립각을 세울 시기에 희생양이 되어 당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음악계에서는 최근 화제가 딘 쇼팽 콩쿠르를 비롯해 차이코프스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3대 콩쿠르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수상은 곧 스타 음악가로의 등용문과도 통한다. 최근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 티켓 파워를 과시한 조성진의 스타성도 쇼팽 콩쿠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헤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과 문학의 키를 재고 몸무게를 다는 건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인간 아니 모든 생물은 누가 누가 잘 하나를 지켜보고 즐기는 본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근본적인 물음에 부딪힌다. 예술과 문학의 키를 재고 몸무게를 다는 것이 정당하고 타당한 지 그 기준이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지 하는 것들이다. 음악은 템포나 강약 기술적인 요소에 작곡가의 의도나 전체적인 음색으로 미술 또한 색감이나 구도 같은 완성도의 지표는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탁월성을 보는 전문가의 시각은 대체로 일정한 척도를 가질 것이기에 우리는 수긍하고 박수를 보내는지도 모른다.
현대 추상화의 세계나 문학작품의 경우도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임의성이나 평가의 주관성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바그너가 26년에 걸쳐 완성한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는 자그마치 17시간에 달해 보통 나흘에 걸쳐 나누어 공연되곤 한다. 바그너는 원래 셰익스피어와 같은 작가를 꿈꾼 소년이었지만 그의 고향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베토벤 교향곡을 들은 후 작곡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거장이 혼을 담은 26년이라는 세월의 무게와 노벨상, 콩쿠르의 무게를 저울로 쉽게 달 수는 없다.
다른 방향으로 보면 모두가 1등일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때로는 취향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경지가 예술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쇼팽 콩쿠르를 인터넷 중계로 세심하게 지켜보고 감상평을 보내준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행여 코리안이 수상하지 못했다고 예술의 국적에 따라 너무 실망하지는 말았으면 한다는 말도 보태고 싶다.
시대가 그를 할퀴고 지나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우리는 러시아 작가의 <닥터 지바고>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뿐이다. 때마침 영화 <닥터 지바고> 중에 라라의 테마 음악이 내 선곡 목록 어딘가를 지나며 흘러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