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났다. 부모님이나 유전형질 같은 것은 그냥 주워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사물을 보는 관점과 태도다.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건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예술가들은 생계의 짐에 허덕이면서도 일반인의 관점과는 다르게 다른 하나를 더 보았다. 영원히 남을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자 했다. 때로는 주거의 안정이나 호의호식과 거리가 있는 삶이어도 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수 없이 많은 사랑과 실연의 상처와 방황 속에서도 영원의 선율을 남기고자 했다. 베를리오즈도 푸치니도 그랬다. 여배우를 짝사랑해 온갖 기행을 저지른 베를리오즈, 가정부와의 불륜 파동 같은 구설수 속에서도 작품을 향한 열정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았던 푸치니.
막상 그 자신의 인생은 온갖 생채기 투성이였기에 삶을 예술로 만들지 못했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 후세를 위한 빛나는 예술을 만들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같은 섬세한 인물 묘사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다. 그는 43세의 길지 않은 삶에서 50점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20년 정도를 활동기간으로 잡으면, 1년에 고작 2~3점 정도니까 다작한 작가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열네 명의 자녀를 돌보느라 생계를 위해 장모를 도와 사채 관련 일을 해 돈을 벌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인들이 본받아야 할 다둥이 아빠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다. 두 명의 부인에게서 스무 명의 아이를 가졌던 바흐는 쉴 새 없이 주문제작 형식으로 귀족의 작품을 써야만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 정도 숫자의 자녀라면 자녀들을 데리고 막노동을 해서도 먹고살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예술가들이 처한 삶의 환경은 천차만별이었다. 안락한 의자에서 곡을 쓰고 넉넉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붓질을 한 화가도 있었고, 끼니를 걱정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화두처럼 붙들고 늘어진 뭔가를 위해 끊임없이 몰입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수를 바꿀 수 없을 때는 관점과 태도라는 변수를 바꾸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예술도 인생도 선택이다. 어쩌면 이 길이 맞을까.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다른 길에 젖과 꿀이 흐르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회의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믿고 뚜벅뚝벅 걸어간 이들이 많은 성취를 이뤘다.
당장 오늘 중국집에서 약속한 친구와의 점심을 짜장면으로 할지 짬뽕을 선택할지 우리 앞엔 늘 선택이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