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감나무 그네 집으로

나의 아름다운 사춘기, 사계절

by 은선


시골의 자연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치유해 주었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 바람 한 줄기와 들판 하나하나가 말없이 나를 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날것 그대로의 고통과 아름다움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해 여름, 친할머니 집으로 나와 오빠는 가게 되었다.
집은 백 년이 넘어 보일 정도로 낡았고, 지붕만 기왓장이고 흙으로 만든 집에 궁색하게 시멘트만 벽에 발라둔 모양이었다. 벽지라고 할 것도 없이 신문지가 벽에 붙어 있었고, 방은 창문도 없고 창호지가 발린 문만 있었다. 아궁이에서 밥을 하고, 군불을 때서 온돌방을 덥혔다.

할머니와 나는 정재(전라도 사투리로 부엌을 뜻함) 방에서 지냈다.
오빠는 그나마 최신식으로 지은 벽돌방에서 지냈는데, 그 방은 심지어 연탄보일러였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아침마다 할머니는 밥을 하고 물을 데워야 했으므로 군불을 때야 했다. 새벽부터 황토방 사우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중학교 첫 등교날, 아직 급식실이 없던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싸 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썼던 고모의 도시락을 꺼내어 달달하게 조린 멸치볶음과 김치를 넣어 싸주었다.
그 도시락은 요즘 술집에서나 볼 수 있는 추억의 양은 도시락이었다. 계란프라이도, 분홍 소시지도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아무도 나를 놀리지 않았다.
그런 학교였다. 1학년 한 반, 2학년 한 반, 3학년 한 반, 단 세 반이 전부인 중학교였다.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쭉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골학교 아이들 중 전학 온 아이들은 대부분 사연이 있었다. 집이 망했거나, 부모님이 이혼했거나, 몸이 아픈 경우들.

그런 친구들을 이미 많이 봐왔던 탓인지, 아니면 본래 따뜻한 아이들이었는지 몰라도 그들은 나를 받아주고, 보듬어 주었다.

그 여름, 시골의 볕은 뜨거웠고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여름의 땀은 불안과 긴장을 뽑아내듯 흘렀고, 나는 녹음의 심장을 뚫고 달리는 기사처럼 씩씩하게 걸었다.

가을이 되자, 하굣길 신작로 옆으로 황금빛 벌판이 펼쳐졌다.
늘 폭력의 배경 속에 공포로 떨던 내가 계절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늦여름부터 가을까지는 할 일이 많았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우울할 시간이 없었다.
고추를 말리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며, 깻대를 널었다 비가 오면 재빠르게 마루 밑에 넣어야 했다. 할머니를 따라 밭에 가면 땅벌에 쏘이지 않게 조심했고, 할아버지를 따라 논에 갈 땐 긴팔이 필수였다.

할머니 집에서의 가난은 이전의 불안과는 달랐다.
예측 불가능한 공포에 잠식되어 웅크려 있어야 했던 삶과 달리, 이곳에서는 당장 살아가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무기력이 허락되지 않는 삶, 나는 그 속에서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생존자로 다시 태어났다.

겨울이 되면 장판이 누렇게 탈 정도로 뜨거운 아랫목에서 할머니가 가마솥에 일부러 눌려 만든 누룽지 덩이를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엔 지하수가 얼어 물을 쓸 수 없었다. 다라이에 받아놓은 물이 얼어, 그 얼음을 깨먹거나 눈을 녹여 마시곤 했다. 시골집에는 욕실이 따로 없어 여름엔 수돗가에서, 겨울엔 친구 집 곰솥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하기도 했다. 목욕 후 친구의 할머니는 우리에게 쌈장으로 만든 떡볶이를 해주셨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다시 봄이 오면, 나는 또 한 해를 살아냈다는 자부심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성장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집은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구덩이를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구조였다. 시간이 지나고 키우던 개가 흙을 파는 바람에 흙벽이 무너지고, 발판이 내려앉아 똥이 떨어지는 구멍이 막혀버렸다.
그 꼴을 보고도 모두가 외면했지만, 나는 무너진 벽을 다시 세우고 막힌 구멍을 뚫었다.

처음으로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내 손으로 돌보는 일’을 해낸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내 안에서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더럽고 무서운 기억의 공간이, 내가 고치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 일은 단순한 수리가 아니었다.
삶의 더럽고 수치스러운 구멍을, 내가 직접 메운 행위였다.
그 뒤로,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는 내 안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곳을 넘었고, 내 삶은 이제, 내가 짓고 고치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여섯 번 보냈다.
매일 등굣길엔 친아빠가 돌아가신 그 장소를 지나쳐야 했지만, 나는 그 속에 잠식되지 않았다.

자연이, 가난이, 노동이, 사람들이 나의 사춘기를 아름답게 물들여주고 바른길로 이끌어주었다.
인생의 가장 멋진 길에서, 나는 어두운 장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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