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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다

by 딜리버 리

방학 때면 친가, 외가에 일주일 정도 갔다. 고등학교 이후론 공부(하진 않지만) 핑계로 안 갔다. 지금 생각해도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을 때에 방학에 간 걸 보면 보호자가 보내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에 엄마 만나면 여쭤봐야겠다. 그나마 TV가 있는 외가를 더 좋아했는데 그렇게 갈 때마다 가방 안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을 책을 몇 권씩 들고 갔다. 공부 못(안)하는 것들이 놀러 갈 때 책 챙긴다더니, 나를 보면 맞는 말이다.


대체휴무 5일을 10월 23일~31일로 사이로 모으는 데 성공했다. 선택과 집중! 어디든 필요하다. 10일 정도 대만 남부(가오슝과 타이난)를 돌아다닐 건데 현지 정보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 싶어 대만 가이드북 한 권과 ‘나는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다'을 부제로 단 <아무튼, 인터뷰>(은유 / 제철소)를 서울 출장짐에 넣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처럼 지난번 출장처럼 안읽을게 뻔하지만 공부 못하는 것들이 가진 불안을 달래기 위해 챙겼다. 그나마 이번엔 수박 겉핥기일망정 2권을 읽었다.


스마트폰으로 세상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가이드북이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가이드북은 꾸준히 출간된다. 서점 매대에 깔린, 도서관에 비치된 가이드북을 보면 요즘 인기 있는 지역이 어딘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 대부분의 가이드북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기 여행지는 쓸데없이 세세한 정보가 넘치지만 비인기 지역은 구색 맞추기인걸 대놓고 드러낸다. 지금은 책형태로 가이드북을 만들지 않지만 론리플래닛은 그런 점에서 낯선 곳에 대한 기본 정보(위치, 역사, 교통편, 가격대별 숙소와 식당)에 충실한 가이드북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가이드북 저자들은 자신이 먹었다는(정말?) 음식에 대한 호불호에서 그치지 않고, 여기 와서 이 음식을, 이 집에서 꼭 먹어야 함을 강조한다. 마치 부산 사람들이 돼지국밥과 밀면을 매일 먹는 듯 얘기한다. 안 그래도 여행지의 현지민들이 즐겨 찾는 식당이었는데, 덕분에 대기줄이 더 길어졌다. 한국에서 밥벌이를 하면서, 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도 한국인들끼리 경쟁하느라 피곤하다.


이게 왜 필요할까 싶은 장황한 정보를 수십 페이지씩 할당한 가오슝과 타이난에 비해 달랑 몇 페이지뿐인 타이둥에 마음이 갔다. 2년 전, 당연히 중국스런 문화일꺼라 짐작했다가 태평양 섬문화와 유사한 대만 선주민들의 문화를 타이베이 선주민박물관에서 본 기억 덕분이지 싶다. 당연하게 여겼던-의심하지 않았던-사실이 편견이었음을 원본 실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서 여행지에서 박물관 가기를 좋아한다. 물론 사실을 작정하고 조작하고 왜곡하면 없던 편견이 생기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왕왕 있었고.


어쨌든 지형과 자원, 교통 여건상 발전 속도가 늦은 덕분에 선주민의 문화 유형이 더 많이 남았을지 모른다. 나의 판단은 내가 겪은 경험의 총합이다. 가오슝(2일), 타이난(2일), 류추섬(1일), 타이둥(2일), 가오슝(1일), 가능할까?


은유가 인용한 카르티에 브레송의 인터뷰모음집에, 당신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브레송은 손톱 깎는 일이라 대답한다. 브레송 영감~ 멋진데! 머리가 산발이 되고 수염은 더부룩해도 지내는데 불편을 모르겠는데, 일정 이상으로 손톱이 길면 그렇게 신경 쓰인다. 그래서 장기 여행 갈 때 손톱깎이를 꼭 챙긴다. 777 제품을 몇 년 동안 잘 썼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분실해서 영등포의 어느 편의점에서 산 걸 지금 것 들고 다닌다.


“당신이 가장 경멸하는 인간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을 경멸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어째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진은 피사체를 바라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 찍는 사람은 피사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이러니 그렇게 멋진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겠다 싶다. 브레송의 인터뷰집도 읽어봐야겠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총합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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