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곳에서, 건강하게

『검은 여우』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밤이면…… 깊은 밤처럼 새카만 검은 여우의 울음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숱한 시간을 뛰어넘어.’


『검은 여우』 한 구절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까뮈 『이방인』 한 구절이 떠올랐다. 뫼르소가 살면서 딱 한 번, 강하게 목소리를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대사 마지막 부분 ‘시간을 거슬러 불어오는 바람’ 말이다. 그 바람 때문에 뫼르소가 삶을 사는 태도는 정해졌다. 『검은 여우』 톰 또한 비가 내리면 숱한 시간을 뛰어 넘어 찾아오는 그 날의 기억으로 그 날 이전과 이후 삶이 달라졌다. 외형적으로 똑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세 번 읽었다. 단편집이 아닌 장편 동화를 세 번 읽은 것은 아직까지는 이 책이 유일한 것 같다. 읽을 때마다 매 번 좋다. 어른들이 보기엔 얼토당토않고 황당하게 보이는 아이들의 생각과 우정, 야생 동물을 실제로 보는 설렘과 흥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이전까지는 할 수 없었고 절대 하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을 감행하는 아이 마음.


어릴 적 TV로 보았던 ‘초원의 집’이 떠오르는 미국의 한 농장. 톰은 여름 방학을 이모 농장에서 보낸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세상 무료할 것 같은 시간들은 ‘정말 좋은’ 시간으로 바뀌고 톰은 ‘부모님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인정’ 한다. 그렇게 변하게 된 중심에 바로 검은 여우가 있다.


톰은 농장 넓은 초원에서 무료함을 달래다 생전 처음 검은 여우를 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흰 꼬리, 탐스러운 검은 털, 여우는 풀숲에서 꼬리를 흔들거나 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개를 갸웃하고 때론 캥캥거린다. 톰은 점점 검은 여우를 기다리거나 안보이면 찾아 나선다. 검은 여우와 톰은 이렇게 거리를 두고 서로를 응시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이모부가 놓은 덫에 새끼 여우가 걸린다. 위험에 처한 새끼를 구하기 위해 어미 여우는 적을 유인하거나 새끼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며 필사적으로 애쓴다. 비 오는 밤, 톰은 계속 검은 여우를 지켜보다가 2층 창문을 통해 나무를 타고 내려가 새끼 여우를 풀어 준다. '그런 건 절대 안해'라고 말했던 나무타기를 해서 말이다. 그리고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는다. 그 날 이후 톰은 그 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책 속 그림

생명과의 교감에서 오는 충만함을 차근차근 잔잔하게 풀어냈고 위트 있는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야생동물이 주는 건강함과 낯섦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듯 하다.



검은 여우의 사투로 동물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동물원을 참 좋아해 언제나 가자고 조르는 아이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우리 안에 있는 동물들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맥없이 누워 있거나 이상 행동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는 계속 핑계를 대며 가기를 미루었고 아이들이 좀 크고 나서는 동물원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곳인지 설명과 설득을 하며 가지 않았다.


한 TV 프로그램에서도 이야기한다. 동물원은 가장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으로 아이들과 동물을 만나게 하는 장소라고. 예전에는 흑인 노예 혹은 원주민들 또한 바라봄, 구경의 대상이었다고 말이다. 동물원이 직접 가보지 못해 만날 수 없는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을 제공해 주는 곳으로 합리화되어 존재해야 한다면 그들의 삶을 우리가 잠시 엿보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곳의 기후나 환경은 대개 동물들의 고향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때 되면 제공되는 먹이와 생명의 보장이 가족이나 무리와 떨어져 갇혀 있는 생활보다 그들에게 행복한 삶을 줄 것인가? 이는 누구를 위한 삶인가? 인간의 볼 권리, 경험과 연구를 위한 기회가 과연 생명의 존엄성보다 우위에 둘 수 있는 가치인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톰은 검은 여우를 만났다. 하지만 여우는 여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여우답다. 새끼 또한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한다. 검은 여우는 동물과의 교감으로 한 소년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지만 어떤 생명이든 그들이 그들만의 세계에 있을 때 가장 건강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 아침



* 『검은 여우』베치 바이어스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사계절

* 『이방인』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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