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끝이 알싸해지고 발이 시린 계절이 왔다. 유리 나기빈의 「겨울 참나무」를 읽는데 내내 추웠다. 눈 덮인 숲 속 풍경이 계속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1.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24살 선생님 안나 바씰리예브나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가 있다. 선생님이 된 지 20년이 넘었다. 친구는 10년 쯤 지났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이제까지 자기는 아이들이 학습을 잘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인지 알았다고. 구구단을 다 못 외우고 학년을 올라가지 않도록,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한글을 잘 알 수 있도록 열심히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부족한 아이들을 남겨 나머지 공부를 시킬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고 친구는 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 수학이나 과학, 사회, 지리만이 아님을 알겠다고 말이다. 이제 친구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틈만 나면 밖에 나가고, 사물과 세상을 관찰하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재미있는 책을 함께 읽는다 했다.
전공 공부를 마치고 이제 갓 아이들 앞에 섰을 안나 바씰리예브나. 그녀도 선생님이 된 지 2년 되었다. 작년 어리숙했던 자신을 회상하며 모든 것에 열심이고 의기 충만하며 자신만만하다. 안나 바씰리예브나를 보며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젊을 때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반대로 젊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와 모험들도 있다. 그래서 나이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열심히 치열하게 그 나이를 살 것!그런 안나이기에 싸부쉬낀 때문에 가게 된 숲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나이만큼 온전히, 충분히 숲과 자연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2. 겨울 참나무
눈 덮인 숲 속, 상상만 해도 눈부시다. 빛을 반사하는 흰 눈, 반짝반짝하는 얼음, 그 밑으로 졸졸 흐르는 (온천)물, 두터운 줄기를 가진 엄숙한 참나무, 참나무를 아파트 삼은, 겨울잠을 자는 온갖 생명들. 이 책의 묘미는 바로 겨울 숲의 풍경을 흠뻑 느끼게 해준다는데 있다. 글자를 읽는데 눈앞에 그림이 서서히 떠오른다.
‘물속으로 떨어진 눈이 녹지 않고 바로 질척해져서는 물속에서 파르스름한 해초처럼 늘어지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이것이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그녀는 장화 코끝으로 눈을 차 물 속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눈덩이가 알 수 없는 기이한 모양으로 길게 흘러들어가는 모습에 기뻐하면서.’ (p.86~87)
3. 싸부쉬낀, 아이, 자연
지름길로 오지만 싸부쉬낀은 항상 학교에 늦었다. 담임 선생님인 안나와 같이 가는 길에도 2시간을 훌쩍 넘겼다. 싸부쉬낀은 숲을 매일 지나다니며 이것 저것 살펴보고 보살피느라 걸음이 계속 느려졌다. 그러면서 아이는 계절의 변화를, 숲 속 생명들이 자라고 스러짐을 모두 느꼈다. 싸부쉬낀이 얼마나 부럽던지.
책 속 그림
코로나 19가 막 시작된 2020년 3월부터 5월까지 방과후에 아이들을 보내지 못했다. 집에 계속 같이 있으며 매일 뒤에 있는 작은 산을 올랐다. 크게 한 바퀴 돌면 30여 분 걸리는데 3달 여 동안 산이 변하는 모습을 아이들과 함께 ‘목격’했다.
아침에 간 날도 있고 낮에 간 날도 있었다. 비가 와도 갔고 때론 밤에도 돌았다. 날은 조금씩 더워졌고 밤에 오를 때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시간에 따라 해의 높이가 달라지는 걸 알게 되었고 계절에 따라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피고 지는 순서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딱따구리도 만났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벌레들이 많아졌고 벚꽃이 한창일 때는 유독 벌이 많았다. 세찬 바람에 뿌리가 거의 다 뽑혔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끼이익’ 내는 소리도 들었다.
코로나로 집에 머물러야 했던 날들은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이때까지 봄을 이렇게 충분히 만끽한 적이 있나 싶었다. 자연의 변화를 책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느낄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그래서 지금 생각해도 귀하다.
아이들은 자연과 밀접히 닿아 있다. 아이들이 가능한 많이 자연을 느끼고, 자연 속에서 배우며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콘크리트 건물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생활하더라도, 디딜 땅이 점점 더 좁아져도 최대한 노력하면 좋겠다. 게임을 하는 아들을 억지로라도 자전거를 타자고 데리고 나가고, 좀 더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연 속에 고요히 머물러 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든 관심이 자신과 친구인 나이에 관조와 머무름은 조금 더 많은 연습과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과 몸을 가진 아이들은 나이에 맞는 리듬대로 또 그 시간을 살아내야지!
그래도 어린 시절 자연과 함께 한 경험과 기억이 몸과 마음 어딘가에는 분명히 어떤 흔적은 남길 거라고 믿는다.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을 지탱해주는 튼튼한 기운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혼자 돌아가야 하는 선생님이 걱정되어 싸부쉬킨은 큰사슴을 만났을 때 엉덩이를 치라고 나뭇가지를 하나 건네준다. 대신 너무 약하게도 너무 세게도 치진 말라고 당부한다. 싸부쉬킨은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온몸으로 체득한 아이다. 비록 학교를 지각하고 맞춤법은 틀리게 말해도 말이다. 우리 아이들도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사진: 아침
*『메아리』유리 나기빈 지음, 류필하 옮김, 소담출판사(유리 나기빈의 단편집은 다른 출판사에서도 나와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으로 「겨울 참나무」를 처음 만났다. 그림 픽셀이 깨져 있고 그린이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림도 좋고, 첫만남은 소중하기에 이 책으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