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부터 먹구름 가득했던 하늘에는 늦은 밤이 되자 더욱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K 대표는 차량 내비게이션을 힐끗 보았다. 이대로 쉬지 않고 30~40분간 계속 달리면 예상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는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차량정체 구간을 만나게 되었다. 조금씩 가다 서기를 계속 반복 중이었다.
K 대표는 며칠 전 그에게 날아온 한 통의 의뢰 문자를 받고 고심 끝에 수락하였다.
의뢰인이 원했던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그 고객은 K 대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했다고 말했다. K 대표는 자신이 그간 의뢰받아 해왔던 일에 대해 일기나 수필 형식으로 글을 써왔고 그것들을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올려놓곤 했다.
꾸밈없고도 소소한 일상의 일들을 소재로 써 내려간 그의 진솔한 글들은 자기 일에 사명감마저 느껴가며 성실하게 일해오고 있다는 인상을 고객들로부터 받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이번의 문자 의뢰인 역시 K 대표의 글을 읽은 뒤 일에 대한 철학과 책임감을 지니고 성실하게 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그에게 신뢰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 어느 업체보다도 깔끔하고 성실하게 일을 잘 마무리해 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의뢰인은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고객의 신뢰에 고마워하였지만 일을 수행하는 조건에 약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고객이 원하는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이 늦은 밤 시간대였다.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몇 번의 야간작업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 오후 9시 이전에 작업을 끝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너무 늦은 시간에 작업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벽까지 작업이 이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이 됐다. 그래도 단 하룻밤의 야간작업 수당치고는 꽤 높은 금액을 고객이 지급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고민을 그다지 오래 하지 않았다. 밤늦게 작업해야 하는 이유를 물어보았을 때 고객은 단지 남의 눈을 피해서 작업해주길 원한다고만 말했다.
K 대표는 일의 특성상 당연히 그렇게 의뢰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결코 일반적이지는 아니하였다.
정체가 풀리기 시작했다.
다시 차량들이 제 속도를 내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반복적인 직선 구간 주행이 계속되면서 지루해짐을 느끼기 시작했고 살짝 눈꺼풀이 무거워지려고도 했다. K 대표가 졸음을 쫓으려고 껌 통에서 껌을 꺼내려 했다. 바둑알 같은 껌을 두 알 정도 잡았다. 한 알은 씹기가 편하지만, 왠지 허전하다. 그렇다고 세 알을 씹을 때는 껌의 부피가 커져 씹을수록 턱이 아파 왠지 부담스럽다. 두 알이 그가 씹기에 딱 적당했다. 깨물자마자 알싸한 느낌이 혀를 통해 졸리던 신경세포를 깨우고 있었다. 시원한 멘톨 향이 입안 가득 퍼지자 일순간 잠이 달아나는 듯하였으나 단물이 빠지면서 턱만 아려오기 시작한다. 그가 운전석 창문을 반쯤 열자 습하면서도 뜨거운 열대야 바람이 차 안으로 확 밀려들어 왔다. 퉤 하고 껌을 차 밖으로 뱉어버린다. 하지만 이내 뒤늦게 깨달은 듯 아차차 하며 그가 자신의 머리를 세게 한 대 내리쳤다. 종이에 싸서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려야 할 씹던 껌을 도로 위에 함부로 뱉어버린 그의 무의식적이었던 무책임한 행동을 그렇게 자책하였다. 차 안의 차가운 공기가 더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내 다시 창문을 올렸다. 그가 다시 냉방 온도를 최대로 더 낮추어 열기로 빼앗긴 실내공기를 다시 차갑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전방을 주시하는데 가느다란 실금 몇 가닥이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하늘을 수직으로 갈라놓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천둥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미치겠네. 이제 비까지 내리려고? 아직도 갈 길이 먼데.”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잠시 후 고속도로 출구가 나온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길을 놓치지 않으려 수백여 미터 전방에서부터 잔뜩 긴장하며 주행차선에서 벗어나 나들목으로 진입하려고 차선을 바꾸자 분홍색 차로 유도선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색상을 보자마자 갈라지는 차로가 나뉘지 않고 한 방향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눈이 어두운 편이었고 더구나 길치이다 보니 특히나 야간운전은 되도록 피하던 그였다. 벌건 대낮에 고속도로를 달려도 분기점이나 나들목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지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당을 얻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내려가기 위한 오늘의 야간운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터였다. K 대표는 한 건의 의뢰를 받을 때마다 작업공간에 따라 짧게는 하루 이틀 그리고 대개 3~4일 혼자서 일을 처리한다. 작업공간이 넓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그만큼 일손이 많이 필요할 경우 간혹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아니면 그때그때 협력사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일을 빨리 끝내기도 하지만 혼자 하는 개인사업이다 보니 보통은 도움 없이 의뢰받은 일을 여러 날 혼자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의뢰인의 말을 믿고 수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오늘 하룻밤 눈 한 번 질끈 감고 의뢰인이 말한 그 장소에서 평상시 그가 하던 일을 그대로 하기만 하면 적지 않은 보수를 받을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더구나 의뢰인은 K 대표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기로 약속한 금액에서 계약금 조로 10%를 미리 지급하였다. 그리고 잔금은 일이 끝난 후 받기로 약속하였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그는 고속도로 출구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국도로 들어오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후드득 하며 빗방울이 앞유리창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대기 불안정에 따른 국지성 집중호우를 주의하라고 오늘 내내 방송사의 기상캐스터가 강조했던 일기예보가 계속 떠올랐다.
제법 빗방울이 굵다. 와이퍼가 떨어지는 빗물을 좌우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오고 가는 차량이 없었다. K 대표는 의뢰인이 알려준 대로 주소를 찍은 내비게이션의 현재 위치를 재확인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기도 했지만 발음하기도 어려운 마을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예상 도착시각은 20분 정도 남은 것으로 되어있다.
건널목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뀌었다. 건너는 보행자가 없었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때 휴대전화와 연동된 차량 블루투스 오디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협력 업체 사장이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수차례 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연락이 안 닿았던 터였다. 충전하지 못하여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는 곧바로 핸들에 연결된 통화연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이어 차량의 스피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꽤 취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장님! 오늘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됩니까?”
"아이고, 대표님. 죄송하게 됐심더. 내 전화가 어딨는지 모르다가, 밖에 모임 있어서 한잔하러 나왔다 아이가예. 보니까 폰이 어딨는지 아예 생각도 안 나고, 잃어버린 줄 알고 혹시나 싶어 다시 그 식당 가봤는데 없더라고예. 길 가다가 흘렸나 싶어서 온 길 다시 돌아가 찾아봤는데, 아무튼 수고 많았심더."
횡설수설하는 그의 혀 꼬부라진 말투에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처음에는 못 알아듣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어딘가에서 잠시 잃어버렸던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 번호가 사장님 번호던데, 어디서 찾으셨어요?”
"사무실에 있습디더. 이런 정신머리 가지고는."
본인이 생각하고도 무안했던지 조금 과하게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는 협력 업체 사장에게 K 대표는 안심이 안 되었던지 한 번 더 다짐을 받으려 했다.
“내일 절대 늦으시면 안 돼요. 새벽 일찍 알려드린 주소로 반드시 와주셔야 해요.”
"당연하지예. 우리가 어데 한두 번 거래합니꺼."
“더 좋은 건 지금인데,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직원 한 명만 보내주세요. 야근 수당 포함해서 두둑이 얹혀드린다니까요.”
“아이고, 이 시간에 일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꺼? 그나저나 만다꼬 이런 일을 야밤에 합니꺼…….”
K 대표는 대답 대신 재차 늦지 말아 달라는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배터리 충전 상태가 부족한듯하여 차 안의 충전기를 찾는데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가속 페달을 밟으며 오른손으로 콘솔박스를 열어 더듬어 보았지만, 충전기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의 눈이 조수석 앞으로 쏠렸다. 조수석 앞의 글로브박스를 열기 위해선 몸을 많이 기울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차량을 일시 정지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내 단념하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비는 아까보다도 한층 더 강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앞 유리의 와이퍼도 정신없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차량 지붕을 강타하는 빗방울 소리가 지붕을 뚫듯이 거센소리를 내며 차 안으로 들어와 어느새 그의 심장도 세차게 강타하고 있었다.
늦은 밤 국도 위를 오가는 차량은 단 한 대도 없었다. 거세게 내리는 빗물을 쓸어내리기 위해 와이퍼가 정신없이 제 할 일을 다 하며 운전자의 안전한 전방확보를 위해 열심이었지만, 가뜩이나 밤눈이 어두운 K 대표는 전방을 제대로 주시하며 운전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속도를 줄여서 운전했다. 빗줄기가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 그가 어딘가에 차를 잠시 주차해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마땅한 곳이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내리퍼붓는 비로 인하여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휴게소나 졸음 쉼터라도 바로 보이면 잠시 비를 피해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가 상향등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아까보다는 훨씬 밝게 멀리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세차게 몰아치는 강풍과 정신없이 쏟아지는 폭우에 그는 여전히 운전에 어려움을 느꼈다.
“아, 진짜 짜증 나네.”
그가 다시 혼잣말하는데 경로를 이탈했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설정된 주소에 맞추어 GPS 수신을 다시 시도하는 듯 정지된 내비게이션 화면 정중앙의 신호 표시가 뱅글뱅글 돌며 현 위치를 한참 동안 찾고 있었다.
“빨리 좀 찾아라. 제발!”
그가 신경질을 내자마자 내비게이션이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현재 위치를 보여주면서‘잠시 후 150m 앞 좌측 10시 방향으로 직진입니다’라는 안내음성을 내보냈다. 그가 더욱 전방을 주시하려고 자신의 몸을 좀 더 핸들 가까이 밀착하였다. 그리고 분기점에 다다라 속도를 줄여가며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방향을 좌측으로 돌리자 그대로 계속 직진하라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내비게이션에 길 안내를 맡겼지만 정말 믿어도 좋을지 조금씩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