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력단절여성
뒤로 매는 가방을 들었다. 나는 아이 셋을 가진 부자이자 애국자의 가면을 쓴 중년 초입의 여성이었다. 아이들을 재워 놓고 몰래 빠져나온 시간, 열 한시가 넘으니 길거리에 인적이 뜸했다.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발에서 무릎을 타고 마음까지 무언가 올라왔다. 노트북을 우겨 넣은 가방은 가볍지 않았지만 초등학생처럼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가며 통 통 달렸다. 뿌듯하고 가벼운 마음이 올랐다. 마치 기대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모든 행동이 어렵지 않았다. 걸음도 짐도 마음도 쉬웠다. 목적지는 전철역에서 가까운 24시간 운영하는 까페였다.
어린이집에서 만난 엄마 넷이 친구가 되었다. 이 늦은 밤 탈출은 그들을 만나기 위한 일탈었다. 늦은 시간까지 까페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넘쳐서, 넷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마지막 한 자리 밖에 없었다. 그 커피숍을 고른 것을 실수였다. 선명한 백열등은 서툰 우리를 강하게 밝혔다. 우리는 마치 취한듯 했으므로, 상기되어 있었으므로, 우리의 민낯을 숨길 수 있는 어두운 조명이 있는 장소가 좋았을 것이다. 나는 (쑥스러워하며) 노트북과 마음을 함께 꺼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야?”
결혼 하자 마자 아이가 생겼다. 첫아이는 아들이었다. '시가 눈치는 안보겠다.' 생각하며 아들이 반가웠다. 입덧이 심했다. 배멀미 같은 입덧으로 드라마 시리즈 정주행 하나 못 했고, 책 한 권 보기 힘들었으며,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못 봤다. 아주 초기를 제외하고 내내 누워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이를 낳은 날에서야 배에서 내렸다. 숙환이 낫는 느낌이었다. 이제 육지에 발 딛었으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듯 했다.
키우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치 못했다. 아이를 키운지 삼 개월 째. 남편에게 선언했다. “내 앞에서 네가 가장이라고 말하지 마.” 내가 없으면 우리의 삶이 유지되지 않았다. 아이는 내 품에 안겨야만 잠을 잤다. 세끼 식사부터 서랍에 어떤 물건을 넣을지, 남편 속옷의 낡음 정도까지 모두 챙겨야 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 가정의 대장까지 그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남아있는 유일한 명예. 여전히 나의 착한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나에게서 마지막 권위를 빼앗아가지 않았다. 그는 나의 말을 명령처럼 따랐고, 나는 세상의 명령에 따르느라 너무나 바빴다. 그 사이 나의 반려자는 앞을 향해 마구 달려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던 시기가 홀연히 지나갔다. 최초의 차가운 배신이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야?”
우리는 육아의 시간만큼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었다. 이들도 한 때는 직업이 이름을 대신 했었다. 언어 치료 대학원을 다니다 결혼을 한 A,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다 아픈 부모님 간호와 함께 꿈을 접게 되었다는 B, 프랑스 유학의 낭만과 향수를 간직한 C, 그리고 여성의 자립과 가족에 대한 돌봄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낙천주의자 D. 아줌마로 입장하기 직전, 30대 후반이었던 우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작은 목소리로 꿈을 속삭였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 시간을 초 단위로 쓴다는 삼십대 초반에 결혼과 육아를 선택한 우리였다. 우리의 편은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는 꿈을 말하는데 용감했다. 그리고 선뜻 무엇이든 함께 해보자 나설 수 있었다. 육아를 위해 반 쪽 짜리 시간밖에 갖지 못한 우리였으나, 반과 반이 합쳐져 하나가 되는 일을 해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처음,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윌라 같은 오디오북 서비스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팟케스트나 유튜브에 올라간 아마추어들의 낭독 책도 꽤 인기 있던 때었다. 연기를 하던 B는 낭독의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C의 집으로 불렀다. C는 좋은 낭독은 스트레칭에서 나온다며, 평생 한번도 해보지 않은 자세를 알려줬다. 우리는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인 채 저음의 소리를 길게 뽑아 내는 연습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서로 웃었다. 데굴데굴 굴렀다.
두 번째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날, 병원 로비를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 한 바퀴에는 '멍'했다. 두 번째 한 바퀴에는 눈물이 펑펑 흘렀다. 둘째를 계획한 것은 직장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에 가능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잦은 이사를 겪어야 했고, 주변에는 친구도 대안도 없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좋은 경쟁자였던 짝꿍이 달릴 때 나는 우두커니 있었다. 망부석 옛 이야기의 현대적모델이 되었다. 그 날 내가 있던 병원은 그의 직장이자 학교였다. 내가 돋보일 자리는 남편의 아내라는 역할 뿐이었고 나는 소멸된 듯 느껴졌다.
그래서. 뱃 속의 작은 여성과 약속했다. ‘엄마가 너의 삶을 망치지 않을게. 순종적인 것이 여성의 본성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게.’ 꺼졌던 분노의 불을 켰다. 딸깍.
그 짧은 회동의 결과를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팟캐스트 계정 하나 만들지 못했다. 특히 나의 뭉그러지는 발음과 콧소리는 듣기가 힘들었다. 이후 우리는 수공예품 가게로,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제로웨이스트 숍 사장으로, 환경 유튜버로 방향을 바꿔가면서 함께 할 일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결승점에 도착하지 못했다. 때로는 어리거나 아픈 아이가, 스트레스에 찌든 남편이, 거의 대부분은 용기가 부족한 우리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후에 몇몇 이는 취업을 했다. 우리는 마침내 각자의 길을 마련했고, 가장 어린 아이를 키우는 나는 그 자리에 남았다.
셋째 아이를 낳고 우울증이 왔다. 밤이면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났다. 몇날 며칠을 엉엉 울었지만 피곤에 지친 가족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혼자였다. 혼자여서 다행이었다. 방과 거실 바닥 마다 장난감이 흩뿌려져 있었고, 싱크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설겆이가 쌓여있었다.
특히 큰 아이에게 거친 화를 냈다. 분노와 무기력을 당장 해결해야 했다. 첫째와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막내는 엄마에게 부탁한 뒤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연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지금 정신과에 가는 길이야.” 사뭇 비장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진단 결과, 우울증이 아니었다. 코미디 같았다. 평가지를 읽은 의사는 나의 성격에은 우울이 머물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평생 밝음의 그늘에 갖혀 산 것 같았다. 수용적이고 순종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분노는 방향을 잃고 시들해졌다. 나의 우울은 영원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내 속도대로 흐른다. 한번도 빨리 갔던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의 삶도 열심히 노를 저은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경력 단절기에 있는 여성의 노젓기는 다른 것보다 힘든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것이다. 여성의 경력단절기는 전형적이지 않다. 전형성을 찢어 발겨야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배우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것들 때문에 겪는 좌절에 백기를 들어서는 안된다. 나에게는 나의 엄마가 물려준 피가 흐르고, 나의 딸은 나에게 강한 나침반을 선물했으므로 길 잃을 리 없다.
몸서리 치게 추운 코시국의 겨울 날, 우리 넷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네 명의 여자가 아이 여덟을 데리고 민통선 너머의 마을로 갔다. 습기 먹은 땔감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달콤한 술과 쓰디쓴 술을 함께 나누며 여전한 진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넷은 마침내 함께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각자의 삶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이 항해가 끝나는 날에 항시 기억하지 않겠는가. 오롯한 내 편이 있었다는 걸. 내 이름 불러주는 존재가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