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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슬기 Oct 26. 2022

힘들 때마다 꺼내 먹는 비타민

하고 싶은 게 많은 우리에게 그 일을 하게 만들어주는 연료




"당신, 뭐 좋아해요?"




 어떤 하루에는 괜찮지 않던 기분을 괜찮은 기분으로 바꿔주는 일들을 겪곤 한다. 편의상 그 일들을 비타민이라고 부르겠다.

 내게 "푹 잤다!"로 시작한 아침은 꽤나 괜찮은 하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밤새도록 굳어진 몸에 기지개를 켜고 잠에서 덜 깬 나를 깨우고 나면, 그제야 내 것 아닌 것 같은 몸이 내 것으로 느껴진다.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면서 고된 하루도 거뜬히 이겨낼 것만 같은 기운과 함께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부족한 잠이 날 괴롭히려 들면 낮잠을 통해 비타민을 충전한다. 어떤 날은 쌓인 피로를 뒤로하고 글을 써야만 했는데,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아 삼십 분을 자고 일어났다. 삼십 분의 비타민은 두 시간 동안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두 시간이 지나고 다시 글이 써지지 않자, 또 삼십 분을 잤다. 이번에는 세 시간 동안 글을 썼다. 마치 진 게임에 코인을 넣고 계속 이어가는 것처럼, 몇 번을 반복하니 끝내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지속되며 오래가는 비타민도 좋지만, 자주 먹는 비타민의 효과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날이다. 나는 비타민을 적절히 이용하면서부터 하루를 윤택하게 보내는 시절을 자주 겪고 있다.



 꼭 읽고 싶었던 책이라도 따분한 책은 존재한다. 그런 류의 책을 읽다 보면 금방 지쳐버린 내가 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건지 글자 수를 세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이럴 때는 초코바 한 개를 먹고 바깥에 나가 일 분 동안 심호흡을 한다. 그러고 나면 책 오십 페이지를 읽는 일이 훨씬 수월해 진다. 귀가한 집에 드러누워 씻을 힘이 나지 않을 때는 자기 전에 보는 넷플릭스 삼십 분을 생각한다. 그럼 양치하고 샤워하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한주 동안 쌓인 마음의 응어리가 무겁게 느껴지면 아차산 둘레길에서 산책을 한다. 그럼 한 주간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 이처럼 지칠 때마다 한 알씩 꺼내 먹었던 비타민은, 삶의 난이도가 높아질 때마다 낮춰주며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가 하면 효과가 탁월한 만큼 부작용도 함께 따르는 아주 특별한 종합 비타민도 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지나치게 사랑하고 원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일들이 있다. 적당한 소란스러움과 은은한 조명과 서늘한 온도가 알맞은 카페에서 콜드부르 한 잔을 주문하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친다. 그간 열심히 수집했던 글감도 꺼내본다. 글감은 대체로 내 눈과 마음으로 담았던 사물과 풍경과 사람에게서 얻어온 것들이다. 이를테면 늘 다니던 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고양이가 될 수도 있고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고가도로의 풍경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적절하도록 완벽했던 나는 빈 화면을 바라보며 기품있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섹스하고 싶다.’

 ‘늘 다니던 좁은 골목길에서 섹스하고 싶다.’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고가도로에서 섹스하고 싶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덮는다.

 






 많이 사랑스러운 애인의 눈빛과 입술과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과잉 분비된 도파민이 적절한 분배를 실패해 성욕에 올인해 버리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야한 생각은 가끔씩 찾아오는 공포와 두려움도 이겨낸다. 나는 너무나 무서운 생각이 찾아들면 야한 생각을 하곤 했다. 때로는 공포보다 무서운 성욕이 사랑과 결합이라도 하게 된다면, 본능을 역행하고자 마음의 체력을 길러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위험하고도 사랑스러운 부작용을 어느정도 견디고 나면 안정기 비슷한 것이 찾아오는데, 안정기에 접어들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발생된 도파민을 적절히 통제하게 된다. 사랑 속에서 파생된 열정과 시너지는 혼자일 때 경험할 수 없었던 잠재 요소들의 개방을 돕기도 했다. 아무래도 사랑이라는 종합 비타민은 위험하도록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것 같다.





 가까운 과거에는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유독 잘 이겨내는 이들을 지켜 보며,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비타민을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는 뭘 좋아해?"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힘에 부친 일들에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거나 하기 싫거나 포기하고 싶어도 꿋꿋이 견뎌야 할 때처럼,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힘을 내야만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련들을 악으로만 견뎌내기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수명이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의무와 책임만이 남겨진 견딤에서 나의 행복을 찾기 힘들거라 생각했고 거창하진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삶이 꼭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라볶이만 먹다가 참치김밥도 곁들여 먹는데 그래도 부족한 기분이라면 오렌지 주스까지 함께 먹는다. 이 조합이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행복할 것이다. 약효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마음 맞는 이와 노래방에 간다. 그럼 행복을 두 시간 더 연장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는 행복의 연장선 중 한 가지 방법론이다.



 같은 아파트 일 층 할머니는 단지 내에 있는 야외 운동기구를 이용할 때마다 힘이 솟는다고 말씀하셨다. 억울한 일이 생긴 친구가 거울 속 자신을 보더니 “예쁜 내가 참는다!”라고 말하며 위안을 얻었다. 어떤 이의 엄마는 자식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라 말했고, 어떤 이의 남편은 아내가 웃을 일이 많으면 덩달아 웃는다 말했고, 곰돌이 푸도 내가 좋아하는 날은 바로 오늘이라 말했다. 각자에게 비타민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애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이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비타민을 꺼내 먹는 일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우리에게 그 일을 하게 만들어주는 연료가 되어준다.







 내가 좋아하는 세상의 것들을 나열해 보는 태도가 작은 행복의 시작이 된다. 그런 사소한 태도들이 모여 나만의 행복이 됐고 그 행복들은 나를 돌봤다. 나를 돌볼 줄 알면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매일매일이 기똥찬 하루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가 반복되면 못마땅한 하루보다 마땅한 하루의 기억들이 더 많이 생겨날 것 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마치며 미리 주문해 놨던 당근 케이크를 한 술 떠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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