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녀와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니. 자꾸 단대 다녔냐고 묻는데 말할 수 없었다. 내 정체가 밝혀질까 봐 두려웠다. 사실 그녀에게 여기서 국제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운전기사라고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얘들 기다리면서 차 안에서 말린 코코넛이나 씹고 있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한국에 첫눈이 왔나 보다. 그녀가 눈 소식을 알리는 글을 발행했다. 정말 반짝이는 눈을 여러 장 정성스레 찍어서 그녀 다운 글과 함께 브런치에 올렸다. 마치 내게 보여주는 글 같았다.
한국이 너무 가고 싶다. 학교 앞에 아직도 민정이가 사는지 모르겠지만 잊은 줄 알았던 그 애가 요즘 부쩍 생각이 난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 민정이는 내 첫 여자였다. 나는 자주 백룸에 숨어서 그 애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었다. 헤어졌는데 난 찌질하게 그 애에게 술 먹고 전화를 했었었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의 민정이가 '여보세요? 하아... 전화하지 말랬잖아.' 했던 때가 기억이 난다. 서로 너무 궁핍했던 시절, 힘들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난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나 여기로 날아왔다. 5년이나 지났는데 그 애는 나를 잊었을까. 오늘 밤은 '별 보러 가자'를 들으며 한동안 걸었다. 좀 걷고 나면 잠을 푹 잘 수 있다.
어쨌든 타임 작가를 생각하는 호기심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다. 그래도 타임 작가와의 대화는 즐겁고 기다려진다. 나는 그녀를 부르는 시그널처럼 그녀의 오래된 글에 '저녁에 뭐해요?'라고 남긴다. 그러면 그녀가 온다.
저녁에뭐해요 : 누나, 저녁에 뭐해요?
타임 : 댓글 지우지 말아요. 보고 싶어요. 남겨놔요.
그가 보내온 음악 선물 '별 보러 가자'를 반복 재생해서 하루 종일 들었다. 원래 알고 있던 노래였는데, 새삼 이곳에서 혼자 있으면서 들으니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닿아 듣고 또 듣고 있다. 마치 <저녁에뭐해요>랑 단대 교정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이곳에서 마치 그 애만이 내게 별 보러 가자고 가로등 밑에서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가 말을 걸어오면 자연스럽게 몇 마디의 안부를 물으며 지냈다. 이제 조금씩 그가 말 걸어오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럴 때면 조금 그 애의 일상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재활치료가 막바지에 달해서 마음은 벌써 들떠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그가 말을 걸었다.
저녁에뭐해요 :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내년 6월에 한 3개월 지내다 올려구요.
타임 : 잘됐네요.
저녁에뭐해요 : 누나, 우리 한번 만나요. 음...6월 30일 밤. 같이 별보러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타임 : 예?
저녁에뭐해요 : 단대 저수지 옆 노천극장 맨 뒷줄에서 '별보러가자' 노래 틀고 있으면 금방 알아보겠죠?
타임 : 예...... 그때 다시 연락해요.
그는 그렇게 난데없는 약속을 하고 사라졌다. 지금이 11월이니까 아직도 먼 약속이었다. 과연 그가 나올지도 의문이었고, 나와서 만난다고 해도 이런 초라한 나를 반겨주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폭풍처럼 달려오던 감정이 사그라들고 이제 일상을 회복한 듯, 얼마 전부터는 브런치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나도 점점 일상으로 한발 나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이곳 요양병원은 나처럼 정신은 말짱한데 움직임이 힘들어서 들어온 환자들이 열댓 명 되는 것 같다. 나머지 50여 명은 모두 치매환자이거나 노환으로 갖가지 병을 달고 들어와 있다. 재활치료받는 환자들은 병원 측에서는 웬만하면 빨리 퇴원을 시켜려고 했다. 장기 입원환자인 치매환자를 받는 게 손도 덜 가고 더 돈이 되기 때문이다. 나 같은 환자들이 입퇴원을 하면서 하루라도 공백이 생기면 병원으로서는 손해일 것이다.
나는 결국 이번 달 말에 퇴원을 하기로 했다. 이제 마비도 어느 정도 풀리고 혼자서 뭐든 할 수 있어졌다. 아직도 얼굴 근육은 조금 일그러졌고 왼손은 부자유스럽게 옆구리에 딱 붙이고 다니지 않으면 조금씩 덜덜 떤다. 나는 내 후유증이 몹시 신경이 쓰였으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승철은 나를 다독였다. 병자처럼 말라빠진 생기 없는 얼굴로 퇴원하는 날, 승철은 연가를 내고 내 퇴원 준비를 도와주었다.
아침부터 퇴원 준비로 바쁜데 옆에 최분이 할머니가 또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몇 달을 함께 있었어도 그 할머니와 어떠한 대화도 시도하지 않고 지냈지만 퇴원하는 날 만큼은 좀 살갑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퇴원하는 날, 마침 할머니의 아들이 면회를 왔는데 아주 지적이고 단정해 보이는 중년 남자여서 더욱 살가운 여자처럼 연기를 했다. 그 아들은 체크무늬 남방에 회색 니트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내가 자기 엄마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