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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랑 썸 타는 사이라니. 2

유부녀랑 썸 타는 사이라니

by injury time

선배가 몇 분 만에 답을 해왔다.

그가 정말 선배가 맞다니! 나는 너무 신기하고 놀라웠다. 10년 만이었기에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질문들을 쏟아냈다. 선배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고, 또한 애인도 없다고 했다. 비혼주의자라고까지 했다. 결혼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어느 자동차 잡지사에 다닌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관두고 마땅히 출퇴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책을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거리를 쏘다니며 생활형 예술인으로 사는 듯했다. 그 나이에 어쩌다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지 않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뭐 각자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 후로 나는 이따금 남편이랑 다툰 후 하소연 같은 카톡을 보내곤 했다. 그는 매번 선생님처럼 훈계하며 '딸내미 잘 키워 ㅋㅋㅋ'로 마무리 지으며 대화를 끝내곤 했다.


그러던 어떤 날, 내가 혼자 남겨진 어느 날부터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남편이 석 달 동안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가면서였다. 딸아이도 학교로 학원으로 바쁠 때쯤 혼자 남겨질 때면 나는 선배가 생각났다. 외로움이었을까 무료함이었을까


"우리 다니던 학교 지날 때마다 왜케 선배 생각이 나는지..."

어느 날 다짜고짜 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는 어이없게도 하루 만에 답을 해왔다.

"하여튼.... 여전하다..... 너 그 말투..."


별생각 없이 보낸 안부에 많은 시간 고민을 했는지 그 보낸 여러 개의 말줄임표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나를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나 싶었지만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선배에게 남편이 석 달 파견 나갔다고 요즘 근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날 그 후로 밤을 꼬박 새우며 우리의 카톡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 지금 겪고 있는 생각의 파편, 읽었던 책, 영화, 음악, 정치 얘기까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키득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떨며 밤을 새웠다.

선배는 신기하게도 그 옛날 내가 좋아했던 도토리비빔면, 내가 살던 동네의 골목길, 술 먹으면 매번 데리러 온 후배 녀석, 내가 남자친구랑 헤어져 울고불고한 일까지 죄다 기억하고 있었다.

선배는 매번 설탕을 한 스푼 푹 떠서 내 심장에 뿌려놓곤 했다. 어쩌면 평범한 메시지였는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라서 더 달달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연인들의 달콤하고 약간은 로맨틱한 사랑의 대화는 아니었다. 그냥 그렇지모, 좋았겠다, 아 몰라, 그랬구나, 그럴 테지.... 이런 일상적인 말에도 나는 설레었다.

아, 딱 한번 갑자기 선배가 '너 그때 몸매 좋았었는데'라고 했을 땐 약간 짜릿했던 것도 같다. 나는 '켁'하며 못 들은 척해버렸고 그뿐이었다.


43살 될 때까지의 화려했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지금은 안식년 기간이라는 선배의 계획은 나를 달뜨게 만들었다. 동갑이었고 그래서 힘들고 고단한 삶에 공감이 되었다. 나는 결혼이라는 삶을 선택해 편안한 둥지에 자리를 틀었지만 한편으로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선배의 모습이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두어 달쯤 보내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이미 나는 집안일은 뒷전이 되었고 낮에는 자거나 J에게 해줄 이야기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인을 사귀지 않냐는 질문에 J는 '니가 홀가분한 여자였으면 사귀었을 거야, 벌써 여행도 가고 그랬겠지'라며 내가 임자 있는 몸이라는 것 유쾌하지만은 않다고 했다. '유부녀랑 썸 타는 사이라니' 라며 농담처럼 푸념을 내보이기도 했다. '썸'을 우리가 타고 있다는 게 나는 마냥 신기했다. J는 밤새 카톡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관계이고 지속되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J는 나와 대화방에서 만나는 걸 즐거워했고 기다렸다. 단 한 번도 다른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이지도 않았기에 우리 관계가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관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J는 마음에 쏙 드는 장난감이었을까. 그와 미래를 도모하지 않아도 되니 내 가정을 온전히 유지한 채 그를 옆에 두고 싶었다면 내가 나쁜 년일까. 우리는 그냥 바다에 떠있는 부표처럼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엄마 뭐 보고 웃는 거야?"

한밤중에 J와 카톡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궁금해서 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뒤집에 놓는다. 뒤집어 놓는 순간에도 나는 J의 메시지가 기다려졌다. 미쳤나 보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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