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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01. 2024
한강이 노벨상을 탔다 하니, 니 생각이 났어.
작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니,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다 하니 제일 먼저 인저리 니 생각이 났어.
문득 한강 소식과 나를 연관시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울컥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버렸다. 대체 눈물은 어디 고여있다가 이런 작은 흔들림에도 출렁이며 넘치는 건가.
그는 나와 열두어 살이 많은 아버지의 이복동생이다. 어릴 때 그의 무릎에 앉아 귀염부리던 시간들을 보냈으나 이제는 대면대면해져서 몇 해 만에 한 번씩 안부를 묻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를 닮아 낯설지 않게 여리고 호리호리하게 생겨 나는 그가 좋았다. 특히 그의 반듯하고 얇은 입술이 마음에 들었다. 아,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야위어 기품 있게 늙어가는 눈두덩이도 좋았다.
애증의 당사자들이 이제는 모두 죽음의 무덤으로 들어가 버리고, 남아있는 건 석연찮은 상처들을 숨긴 채 작별하지 않고 애써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자식들 뿐이다.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작은 각시였던 그분이 몇 달 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날, 나는 그를 두해 여만에 만났다. 그 옛날 일본으로 의학 공부를 하고 올 만큼 재력이 남달랐던 할아버지 재산은 한 푼도 남김없이 이미 작은 각시 손에서 자연스럽게 이복동생들에게 넘어간 상태지만, 반쪽의 혈연으로라도 잊혀지지 않고 닿고 싶었던 아버지는 끈질기게 이복동생들을 챙겼었다.
새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상주로 그가 나를 맞이했었다. 전보다 더 야위고 퀭한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던 그는 내가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전에 올려놓고 뒤돌아서자 서둘러 나에게 다가와 내가 뭐라고 내게 무너지듯 파묻혔었다. 하찮은 나는 흐느껴 우는 그를 나는 작은 품에 안으며 다독였었다.
한강이 노벨상을 탔다 하니 니 생각났어. 우리 집안이 그래도 문학과 예술적 기질이 있는 집안인데, 니가 글을 쓴다니 항상 뒤에서 응원했었단다. 너의 소설을 읽어보며 우리 인저리, 계속 글 쓰길 바랐는데, 늘 아쉽더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늘 사람들이 내가 글 쓴다는 걸 알아줬으면 싶기도 하고, 또 몰랐으면 싶기도 했다. 어쨌든 모른 척해주길 바라기도 했다.
직장에서도 내 본캐는 원래 소설 쓰는 사람이고, 부캐로 니들 같은 심심한 월급쟁이는 아니라는 부심으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매일 머릿속으로 소설을 쓴다. 집중력을 키우고, 책을 읽고, 인풋 아웃풋 하고, 24시간 소설 생각을 하지만, 늘 제자리다.
니 소설은 너무 칙칙해.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행복해져야 하는데 글이 어두워.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소설을 써야지, 이게 뭐냐! 좋은 생각만 하고, 읽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줘야지.
나와 결이 맞지 않았던 남편은 처음 내 소설 몇 줄 읽더니 책을 덮으며 핀잔을 쏟아냈었다. 누구는 뙤약볕에서 마른땅에 앉아 잡초 뽑는데, 너는 한가하게 책이나 읽어?라고 조롱을 받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망망대해 흐느적거리는 해파리처럼 쓸모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강이 노벨상을 탔던 날, 내 후배는 흥분하며 축배를 들어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뭉클하고 웬일인지 주제넘게 한강이 대견하기까지 한 생각으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책장에서 꺼내 들어 쓰다듬었었다. 여기 브런치 작가들은 그날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날도 나의 작가님들은 굳건한 신념으로 글을 발행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작가고, 소설을 사랑한다. 졸업한 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학과 선후배들과 한 달에 한번 소설 모임을 갖는다는 후배는 내가 무심히 소설모임 이야기를 꺼내자, 눈에 하트를 가득 담아 '살면서 한 가지는 놓지 않고 쥐고 싶은 게 있어야 하지 않겠냐'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섭게 토로한다. 어떻게든 등단을 해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듯이 주먹을 움켜쥐며 하찮은 데는 출품도 안 해.라고도 한다. 나도 브런치작가라고 어깨를 쫙 펴고 한술 거든다. 거기에 글 발행하면 다른데 출품 못하잖아, 라며 덧붙이는 후배.
괜찮아. 브런치는 알록달록해서 좋아. 나는 브런치를 옹호해 본다.
글쓰기는 중독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이제는 좀 놓고 싶고, 헤어지고 싶고, 잊고 싶고, 잊히고 싶은데도 끈질긴 숙명처럼 우리를 붙잡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잊혔던 애독자에게 메일이 왔다.
작가님, 이제 작품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셨나요?
나는 아직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함처럼 가슴에 품고 아직도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가 묻듯이, 나는, 완전히 도 아니고, 중단도 아닌,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의 삶 그 어디 매쯤을 헤매며. 숙명처럼 오래도록 작별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