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커피교실 두 번째 이야기
초창기 커피교실 분위기는 다소 열정이 지나쳐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주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수강생들한테 다소 미안한 게 강의시간도 너무 길어졌고, 심지어 숙제도 많이 내주는 등 이건 무료 커피교실의 수준이 아니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미 안함 맘도 있다. 그래도 그 열정의 덕분이였을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커피와 까 페를 사랑해주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이벤트가 있는 데, 커피박물관에서 수강생 들이 만들어 준 나의 생일파티였다. 초창기 커피교실은 정말이지 열정 그 자체였는데 한 클 래스는 마지막 수업의 일환으로 커피박물관 투어가 행해졌다. 경기도에 소재한 사립박물관 왈츠와 닥터만이다. 처음엔 그저 수업연장의 목적으로만 방문을 했었는데, 박물관 옆 레스 토랑겸 커피하우스에서 나도 모르는사이 수강생들이 케익과 선물로 나를 맞이 해 준 것이 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처음으로 커피교실이라는 시간을 통해 뭔가 보 상을 받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리고 신기했다. 직장생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흥이 있었다. 내가 직접 기획하고 추진한 모든 일들로 창조 된 프로그램들 인연들 만남들...이 자 체가 감격이고 감동이였다. 그렇게 자체 커피교실을 통해 손님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커피교실은 우리 커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내 매출로 직결됐다. 특히, 원두판매의 증대로 이어져 전체 매출비중에서 최대 30%까지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건 가히 괄목할만한 성과인 것이 다. 찾아오기도 힘든 이곳을 원근각처에서 입소문을 타고 오기시작, 까페는 해를 거듭할수 록 인산인해를 거두었다. 물론, 대다수의 손님층은 여성 아주머니 학부모층이였다. 이 때 느 낀 게 아주머니 네트웍의 파워를 새삼 느낀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커피교실의 댓가로 인사동에 위치한 삼성 레미안 겔러리의 커피강사로 위촉 된 것이다.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게 레미안 겔러리에서 행해지는 프로그램의 강사들은 거의 대부분 현업에서 10년 20년 이상씩 된 분들이였고 주로 각 협회를 대표하는 회장이나 부회장님들로 구성되었다. 그런 그곳에서 초짜 커피사장인 내가 당당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커피클래스를 주도 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이 모든 것이 무료 커피교실에 비롯되었다면 믿겠는가. 꾸준 히 커피교실을 묵묵히 한 결과 수강생 중 한분이 강력하게 나를 그곳에 있는 지인에게 추천 을 했다는 것이다. 나의 강의스킬과 열정을 높이 산 모양이다. 레미안 갤러리에서의 강의는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 해 주었다. 커피를 시작한지 채 1 년도 안되어 약 50여명의 갤러리 손님들을 대상으로 나만의 커피강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 었으니 말이다. 2명의 직원을 데리고 당일의 성공적인 강의를 위해 각종 도구와 재료를 챙 겨갔다. 이른 아침부터 내 강의를 듣기위해 오신 손님들이 삼삼오오 줄을 지어 계셨다. 뿌 듯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오늘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이 정말 만족할 수 있는 강의를 듣고 가시게 해야겠다고. 약 1시간 반에 걸친 강의는 성공리에 마쳐졌다. 별로도 마련한 파워포 인트 자료와 혼신을 다한 강의로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늘 그렇지만 아쉬움은 남기 마련 이다. 이후 전문 블로거들에 의해 나의 강의가 인터넷을 통해 흘러나가고 그걸 본 예전의 직장동료나 파트너들이 전화를 걸어오기도 하였다. 이걸로 끝이 아니였다. 모교회가 운영하 는 문화대학내 년간 전임 커피강사로 또 추대를 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한학기만 진행하기 로 하였는데 반응이 좋아 한 학기를 더 연장해달라는 부탁을 받아들기까지 하였다. 사실, 이 강의는 봉사적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내가 미국 커피업체중 스텀프타운이나 인텔리젼 시아와 같은 커피 전문업체에서 행해지는 지역사회와 연계한 커피사업 컨셉과 같은 맥락이 어서 힘들지만 흔쾌히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모든 커리큘럼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준비할 것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아졌다. 년간 프로그램을 내가 오롯이 다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수업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실습도구와 시청각 자료 심지어는 외 부 커피전문가를 간혹 위촉하여 프로그램의 질을 제고하고 다양화하기에 힘썼다. 이 곳 역 시 한국커피협회 회장이셨던 이정기 대표와 한국커피를 대표하는 조셉의 커피나무 강지형 대표가 각각 1,2대 강사로 활동해 오신 실로 무게감이 넘쳐나는 커피교육의 장소였다. 이곳 을 내가 3대 전임강사로 진행을 맡게 된 것이니 그 얼마나 영광인가. 이 모든일은 거듭 강 조하지만 무료 커피교실에서 비롯 된 것이다. 나중에는 자체 커피교실은 잠시 중단하기로 하였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책임을 맡은이상 민폐를 끼치지 읺기 위함도 있었지만 나 는 엄연히 까페를 운영하는 까페사장이기 때문이다.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직원도 손님도 소홀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외부강의는 더 나은 까페의 발전을 위한 투자이지만 현실에 발 을 딛고 있는 이상 나의 본연의 일에 충실하기 위해선 조절이 필요했다. 커피강의는 내게 끊임없는 자성과 발전을 촉구해 준 고마운 일이였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 음을 느끼게 해 준 감사한 활동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커피를 통해 맺은 많은 인연들과 한 사람 한사람이 귀했다. 비록 처음의 의도는 까페를 성공시키기 위한 전략이였지만, 사실 이 일을 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인생의 많은 것들을 느끼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나는 커피 좀 안다고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었고, 스승의 날이 되었을 때는 나보다 더 나이 드신 수강생들로부터도 제자라는 이름으로 축하와 감사의 선물 그리고 격려가 쏟아져 들어 왔지만, 마음 한켠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수강생중에 부부선교사가 계셨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비밀편지로 소식을 전해주시곤 하는 데 그들이 나 의 첫 번째 수강생들이셨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셨고 우리 커피를 정말 좋아하셨다. 떠나실 때는 많은 불안과 염려로 가셨지만 지금은 중국내 깊은 곳(밝히지는 않겠다)에서 커피하우 스를 운영하시며 선교일에 매진하고 계신다. 커피는 역사적으로보면 선교의 매개체가 되기 에 충분한 상품이였다. 아랍의 와인으로 불리우며 대표적인 이슬람의 음료인 커피는 개신교 의 비즈니스 선교전략의 한 축이 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커피벨트라 불리우는 지역 대부 분이 비기독교 지역 소위 말하는 선교대상 지역이였다. 우리가 흔히 착한커피라고 불리우는 공정무역커피등도 넓은 의미에서보면 기독교가 말하는 선교의 맥락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비록 직접적으로 현지선교를 하는 사람은 못 되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선교일에 일조할 수 있었음에 기뻤다. 그 후 커피교실은 커핑세미나의 확장과 창업전문반으로 확대 운영되었다. 우선 커핑세미나 는 커피교실 출신들을 주축으로하여 일종의 심화반 형태로 진행되었다. 커핑은 말그대로 커 피맛을 관능적으로 시음하여 품질을 평가하고 맛의 특성을 결정짓는 가장 원초적인 검사다. 오늘날 커핑은 주로 커피산지에서 생산자와 구매자사이에 행해지는 일종의 거래과정의 일부 로서 행해지는 툴인데 당시 일반적인 커피하우스 자체적으로 품질평가를 위한 방법으로 또 이러한 세미나 형태로 진행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선하고 깊이있는 시간 으로 수강생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울러, 창업전문반을 개설하여 운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니어층들이 별다른 준비없이 너무 쉽게 까페창업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나름의 경험과 지식 노하우를 바탕으로 집중반을 개설하여 운영하 였다. 창업전문반은 철저하게 1:1 도제식으로 진행되었고, 이 과정을 마친분들중엔 국내외 에서 외식사업으로 진출하신분도 있었고, 예비창업자로서 여전히 창업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