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까페운영 이런게 어렵다 1
나와같은 로스터리 까페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거의 대부분이 동의를 하는 내용들일 텐데, 까페운영을 하면서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 둘을 꼽으라면 아마도 수익성과 직원관리의 문제일 것이다. 로스터리 까페들은 대체적으로 중심상권이 아닌곳에 위치 한 경 우가 많다. 그렇기에 자기만의 특화된 서비스나 특별한 커피가치를 제공하지 못 할 경우 단 골고객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그것은 곧바로 수익악화로 이어진다. 설사, 초기에 단골고객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그 고객들이 이탈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당연한 얘 기같지만, 한국처럼 동네 구석구석마다 까페들이 즐비한 환경에서 까페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 까페는 앞서도 말했듯이 초등학교에 인접한 학부모 상권이자 아 파트 단지내에 걸쳐있는 아파트 상권이다. 그러다보니, 입소문이 빠르고 고정고객들이 많다. 유동인구는 상대적으로 중심상권에 비해 적지만 목적성을 가지고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기 에 유효인구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큰 매출을 기대하기는 어려워도 수준이하의 서비 스만 제공하지 않는다면 매장을 유지하는데 있어선 비교적 안정적 상권이라 할 수 있다. 창업이후 3년동안 우리 매장의 월평균 매출은 대략 700여만원 정도였다. 낮다고 생각되시 는가? 이중에서 월세 90만원 관리비 평균 35만원 인건비 150만원 기타 비용 120만원등을 제하고 나면 대략 300여만원이 남는 구조다. 이는 결코 적은 수익이 아니다. 아주 훌륭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10평짜리 매장을 기준해서 7천만원(보증금 포함)의 목돈을 들여 이 정도의 수익을 내는 매장은 흔치 않다. 보통, 까페컨설팅에서 말하는 평균 초기 투자비용을 1억으로 기준했을 때 월평균 200만원 정도의 수익만내도 성공한 까페로 분류되기 때문이 다. 왜 까페가 창업이후 5년내 생존 할 확률이 26%라는 통계치가 나올까? 그것은 그만큼 커피의 객단가가 낮고 회전율이 생각보다 높지 않으며 진입장벽이 낮아 너무나 많은 창업자 들이 대거 몰린 까닭이다. 설사,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손 치더 라도 경쟁 까페들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른경우엔 이러한 효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까페들은 수익악화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월 100만원의 인건비도 제대로 못 챙겨가는 허울뿐인 까페 사장님들이 허다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구조속에서 까페를 운영한다는 것은 생각이상의 노력과 도전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노력과 도전엔 직원이라고 하는 변수가 언제나 존재한다. 보통 까페창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대를 보면 3,40대 이상이 주를 이룬다. 20대 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자본력에서 가장 안정적인 나이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은 보통 커피에 대한 전문성이 없이 창업을 준비하게 마련이고, 보통은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바리스타들을 고용하는 형태로 창업을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여서, 경험도 있으면서 열정과 마인드를 갖춘 바리스타들을 고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분은 커피에 대한 열정이였 다. 한국의 리틀 스타벅스를 꿈꾸던 내게 좋은직원의 채용은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과제였다.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 결국 남녀 각 1명씩 총 2명의 정직 원과 프리랜서 직원 1명 총 3명의 직원을 채용하였다. 나는 그들을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내 진짜 가족처럼 여기고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비록 월급을 주는 소위 사장이라는 위치에 있다곤 하지만 최대한 그들에게 수평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커피를 배우고, 완성도 높은 커피를 구현하기 위한 영역에서 만큼은 비용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커피로 번 돈의 상당부분을 직원의 만족도와 커 피연구에 투자했다. 지난 7년여동안 까페를 운영해오면서 난 내 돈으로 속옷하나 양말한짝 을 제대로 사 입은 적이 없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매년 까페가 성장해 가기위한 성장전략을 만들어 그들과 늘 공유하며 의지를 불 태웠다. 그리고 창업후 4년 이내에 우리 가 꿈꾸는 매장으로의 이전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하고 협력했다. 나는 그들을 신뢰했고, 그 들 역시 나를 잘 따르며 눈에 보이게 하루하루 까페가 발전하고 있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 행복했다. 급기야 직원들은 각자 살던 부모님 집에서 나와 까페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까페의 성장을 위해 더욱 더 헌신하려 했다. 나 역시 그 헌신에 보답하고자 금전적으로도 평균이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성장을 돕는것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범 위내에서 최대한의 것들을 주고자 노력했다. 이는 평소 직원과 함께 상장하는 아름다운 커 피회사를 꿈꾸어 온 던 나의 소신이였기 때문이다. 커피와 관련된 각종 세미나 및 커핑을 포함한 다양한 양질의 커피교육시 시간과 비용을 전 폭 지원해 주었다. 우리 직원들은 고용된 이후 바리스타 자격증과 커핑수료증 고가의 세미 나 수료증등을 채용이후 근무하면서 다 취득하였다. 그 외에도 가치있는 교육이라고 판단되 면 사장인 내가 그들의 업무시간을 백업해 주어서라도 보내주었다. 심지어는 글로벌 컴퍼니 를 꿈꾸면서 영어학원비까지 별도로 책정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설,추석 상여금 및 선물지 원과 분기에 한번꼴로 까페투어 시행등 10평짜리 영세자영업 까페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직원지원 프로그램들을 과감히 전개하였다. 물론, 이 비용은 전적으로 나의 인건비에서 충 당되었다. 나는 그래도 아깝지가 않았다. 도리어 행복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함께 공유 할 꿈이 있었고 모두가 그 꿈을 향해 전진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이런 금전적인 지원 으로 내가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려 노 력했다. 때론 내 동생들처럼 때론 조카들처럼 대하고자 했다. 그들의 고민에 귀 기울였고 사소한 것이라도 불편함을 해결해 주고자 항상 촉을 세우며 지냈었던 것 같다. 문제는 3년차에 접어들면서였다. 내가 마음이 조급해져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문제였 다. 이미 이곳 매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 보았고 테스트 해 볼 것들은 거의 다 했 다고 생각할 즈음 우리에겐 투자처가 필요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움 직임을 단행했다. 투자만 원할히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매장을 강남에서 새롭게 전 개해 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테스트 베드였던 이 매장역시 높은 권리금을 받고 팔 수도 있었다. 우리는 무권리금 점포를 3년차만에 권리 7천여만원의 매장으로 성장 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투자를 약속받은 상태였으나 갑작스런 지인들의 사업악화로 모든 일정이 늦춰지기 시작했다. 난 기다릴 수 없었다. 아니 기다리기 싫었다. 마침, 친구가 운영하는 강남의 사무실내에 자그마한 공간을 얻어 함께 사업을 추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이곳은 기독교 선교사무실이였다. 이곳으로 난 새벽부터 출근하여 하루종일 다양한 사업계획서 및 투자유치 업무를 진행하였다. 매장은 매니저에게 거의 전적으로 일임을 했으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매출 및 출퇴근 관련 보고를 받았다. 100%는 아니지만 로스팅도 상당부분 교육을 시키고 일임을 하였다. 강남사 무실에서 업무가 종료되면 난 한밤중에 매장으로 가서 새벽까지 로스팅을 하고 3-4시간 잠 을 청한후 또다시 사무실로 출근하는 생활이 수개월간 반복되었다. 그러면서 매장의 위기는 현실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