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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데이트할까?

안성팜랜드

by 바다나무

참았다. 보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서. 혹시 의도치 않게 내 감기가 옮을까 봐 걱정이 되어 더 참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한계수위에 도달했다. 보아하니 그쪽에서도 참고 있는 듯했다. 어쩌다 영상통화를 하면 보고 싶다, 언제 올 거냐고 묻기가 일쑤였으니까. 오늘은 만사 제쳐 놓고 만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늦은 밤 좋아하는 콩자반을 하고 콩물도 갈았다. 콩물에 국수를 넣어 스파게티처럼 돌돌 말아먹는 것을 좋아한다. 맛있게 먹을 모습을 생각하니 요리하면서도 즐겁다.


다음날 곱게 화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집에 가서 기다릴까 하다 서프라이즈 해주었을 때 깜짝 놀란 얼굴 표정을 보고 싶어 그가 다니는 곳의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김없이 3시 반이면 가방을 메고 저 현관문을 통해 나올 것이다.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더니 시간보다 빨리 왔다.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 알았다면 휴게소에서 아이스커피로 바쁜 마음을 식히고 와도 될걸. 그렇지만 내가 기다리는 게 훨씬 맘이 편하다.


오랜만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그의 부모가 한 달 전쯤 다녀갔을 때 본 것 같다. 그럼에도 보고 싶다. 어제는 꿈에도 나타났었다. 날 간지럽히고 저만큼 도망갔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내가 더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절대로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먼저 고백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 보면서 현관문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 모자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신발을 찾아 신는 모습이 선팅유리 너머로 보인다. 얼른 문옆에 몸을 숨겼다. 나와서 누군가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린다. 너무 오래 숨어있으면 성격이 급해 혼자 훅 가버릴까 봐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마주쳤다. 환하게 웃더니 달 려와서 살며시 안아준다. 향기가 난다. 비릿한 향기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도 느껴진다. 그동안 더 멋있어진 것 같다. 잠시 후 무언가를 찾느라 또 두리번거린다. 어쩌면 내 남자친구를 찾는지도 모른다. 늘 같이 다니는 걸 알기에. 내 남자친구도 그를 좋아한다. 내 남자친구가 보이자 허그하며 인사한다. 어째 나보다 더 친한 것 같다.


한동안 눈치작전이다. 나는 준이 보고 싶은데 감기 옮길까 봐 못 가고, 딸은 엄마가 감기 걸려서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아 오라고 못하고. 예전 같으면 딸이 한두 번은 SOS를 쳤을 텐데. 늘 영상통화를 할 때면 할머니, 할아버지 뭐 하냐고, 보고 싶다고 하며 하트를 날리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감기도 나았고 밑반찬 서너 가지를 해서 준이를 만나러 갔다. 마침 딸이 친구 만나러 갔다 제 시간에 못 올지도 모르니 준이 어린이집 하원을 부탁했다. 준이는 27개월 된 외손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동물을 보러 가겠다고 하여 안성팜랜드로 갔다. 평일이라 한산하다. 토끼. 닭. 오리. 소등 그림책에서 본 동물들을 보며 먹이도 주고 걸음걸이 흉내도 내어본다. 물들이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냄새도 났다. 한참 동물농장을 돌다 보니 어디선가 탁! 탁! 부딪치는 소리에 모두가 발길을 멈추었다. 뿔난 염소 두 마리가 사정없이 온몸을 던져 좁은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나머지 염소들은 싸우는 염소 두 마리를 피해 이리저리 떼를 지어 옮겨 다닌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나도 놀랐다. 준이가 몸을 움츠리며 싸우면 안 된다고,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화난 염소가 들을 리 만무하다.


겁먹은 준이를 안고 돌아서며 무엇이 저토록 격정적으로 싸움을 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쯤 되면 내가 읽어주는 동화책에서는 의젓한 하얀 수염이 있는 연세 많으신 염소할아버지가 나타나 중재를 해야 하는데. 하긴 아까 그 우리 속에 나이가 든 할아버지같은 염소조차도 이리저리 무리 속에서 따라 움직이며 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 등을 돌리고 모르는 척면서.


문득 직장 생활하면서 경찰과 우범지역 합동생활지도 하던 때가 떠올랐다. 으슥한 골목에서 몇몇 씩 짝지어 있는 불량 청소년들을 교사의 힘으로만 선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권력의 힘을 빌려야 했다. 당시 등산하다 내려오신 어르신이 젊은 학생들이 모여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훈계하시다 큰 변을 당하신 사고가 있었던 터라 교육현장은 학생생활지도에 더욱더 신경을 썼었다. 하지만 요즘은 청소년들이 나쁜 짓을 해도 어른들이 나서서 타이르는 상황이 많이 줄었다. 혹여 해코지라도 할까 봐.


사람 사는 세상도, 동물세상도 무법자들 앞에서는 비켜가야 만 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도 동물 냄새가 나는 그곳을 비켜가기로 했다.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는다는 기대를 하면서. 유아차를 몰고 산책로를 따라갔더니 와~우! 넘실대는 초록물결의 호밀밭과 알록달록 코스모스 꽃세상이 아름다운 무도회를 펼치고 있었다. 준이가 꽃이다! 하며 춤추듯 달려갔다. 꽃이 꽃에게로!


코스모스 한송이로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한다. 우리는 토끼풀 꽃시계와 팔찌로 사랑고백에 화답했다. 좀 전의 동물세상에서 보았던 갑갑했던 마음을 꽃에게서, 푸르름 속에서 위로받았다. 하늘의 예쁜 구름도 세상은 아름다운 일이 더 많다고 어린 준이에게 가르쳐 주었다. 준이와 손 잡고 넘실대는 초록물결 속을 걸어가며 멋진 데이트를 했다. 사이좋게 지내자고 약속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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