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연습이 없고 늘 초연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모든 막이 새롭고 그 막은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뭐 그렇다. 이쯤에는 익숙해져서 능숙해질 만한데 자만하는 순간 또 위기에 봉착하거나 미끄러져 좌절하고 분노한다. 못돼먹게 굴지 않으려 하지만 밉상인 모습으로 독한 말을 내뱉고는 후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다 참회한다.
용서를 구하지 못하면 실패한다. 나 자신에게도.
내일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자라고 마음먹지만 마음은 격랑에 흔들리고 오늘도 나는 실패한다.
울적해진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한결같고 사려 깊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더욱더. 천하태평이거나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즐겁게 하거나 밝게 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래저래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그림자가 있는 사람이라 평소에는 여유롭지만 주위를 상대를 의식하면 느닷 없이 방어적이 되고 만다.
못났다. 바보 같으니.
나이 들수록 상처에 무뎌지고 강해질 줄 알았다. 그 반대다. 티를 내지 않을 뿐 더 취약하고 더 쉽게 상처받는다. 오래 남는다. 어릴 적에는 상처도 빨리 나았는데 나이 들면 생채기 하나도 흔적을 길게 남긴다.
그래서 두렵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질식되기보다 두려움을 회피하기보다 두려움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감정 자체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나이 드는 건 생각이고 관념이고 기억이며 세월일 뿐. 노화는 감정도 연약하게 만들고 더 느리게 낫게 만든다. 그러니 언제나 두루 마음을 살피고 또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나는 마치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말을 하는 것 같고, 내 살갗의 가장자리에서 느끼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내 슬픔의 핵심은 여전히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요. “
- 줄리아 크리스티에바
그런 날이 있다.
사는 것도 슬프고 죽는 것도 슬프고
아파서 슬프고 숨 쉬는 것도 슬프고
기뻐서 슬프고 추워서 슬프고
외로워서 슬프고 평온해서 슬프고
저 노을이 슬프고 저 벚꽃이 저 낙엽이 슬프고
고개 숙인 어깨가 슬프고
존재하는 자체가 구슬픈 날이.
이런 날은 공기마저 온통 슬픔이 감돈다.
용기가 필요하다.
내 잘못을 내 과오를 내 실수를 내 약점을 내 그림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유쾌하고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넘길 수 있는 용기.
우리의 그늘과 그림자와 슬픔과 대면할 용기. 삶의 허무에서 유의미를 찾아낼 용기.
그리하여 넘어지고 상처받을지라도 사랑할 용기.
슬픔에 잠식되지 않을 유일한 길.
사랑하기.
슬픔이 몰려올 때는 떠올려봐.
돌아보니 그 모든 시간 속에 사랑이 있었음을.
아침 출근길 밤 퇴근길 풍경.
풍경 속 타인을 보며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한마디.
연민은 내 입장에서 너를 바라보는 것.
공감은 네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
연민으로 시작해서 공감으로 끝나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