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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슬픔의 가장자리에서

by 홍재희 Hong Jaehee



인생에는 연습이 없고 늘 초연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모든 막이 새롭고 그 막은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뭐 그렇다. 이쯤에는 익숙해져서 능숙해질 만한데 자만하는 순간 또 위기에 봉착하거나 미끄러져 좌절하고 분노한다. ​못돼먹게 굴지 않으려 하지만 밉상인 모습으로 독한 말을 내뱉고는 후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다 참회한다.

용서를 구하지 못하면 실패한다. 나 자신에게도.

내일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자라고 마음먹지만 마음은 격랑에 흔들리고 오늘도 나는 실패한다.

울적해진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한결같고 사려 깊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더욱더. 천하태평이거나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즐겁게 하거나 밝게 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래저래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그림자가 있는 사람이라 평소에는 여유롭지만 주위를 상대를 의식하면 느닷 없이 방어적이 되고 만다.


못났다. 바보 같으니.

나이 들수록 상처에 무뎌지고 강해질 줄 알았다. 그 반대다. 티를 내지 않을 뿐 더 취약하고 더 쉽게 상처받는다. 오래 남는다. 어릴 적에는 상처도 빨리 나았는데 나이 들면 생채기 하나도 흔적을 길게 남긴다.

그래서 두렵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질식되기보다 두려움을 회피하기보다 두려움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감정 자체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나이 드는 건 생각이고 관념이고 기억이며 세월일 뿐. 노화는 감정도 연약하게 만들고 더 느리게 낫게 만든다. 그러니 언제나 두루 마음을 살피고 또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나는 마치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말을 하는 것 같고, 내 살갗의 가장자리에서 느끼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내 슬픔의 핵심은 여전히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요. “

- 줄리아 크리스티에바

그런 날이 있다.

사는 것도 슬프고 죽는 것도 슬프고

아파서 슬프고 숨 쉬는 것도 슬프고

기뻐서 슬프고 추워서 슬프고

외로워서 슬프고 평온해서 슬프고

저 노을이 슬프고 저 벚꽃이 저 낙엽이 슬프고

고개 숙인 어깨가 슬프고

존재하는 자체가 구슬픈 날이.


​이런 날은 공기마저 온통 슬픔이 감돈다.


용기가 필요하다.

내 잘못을 내 과오를 내 실수를 내 약점을 내 그림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유쾌하고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넘길 수 있는 용기.

우리의 그늘과 그림자와 슬픔과 대면할 용기. 삶의 허무에서 유의미를 찾아낼 용기.

그리하여 넘어지고 상처받을지라도 사랑할 용기.


슬픔에 잠식되지 않을 유일한 길.

사랑하기.

슬픔이 몰려올 때는 떠올려봐.

돌아보니 그 모든 시간 속에 사랑이 있었음을.



​아침 출근길 밤 퇴근길 풍경.

풍경 속 타인을 보며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한마디.

연민은 내 입장에서 너를 바라보는 것.

공감은 네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

연민으로 시작해서 공감으로 끝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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