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곱만 대충 떼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목욕탕에 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홉 시. 뭐 먹을까 고민하다 카레로 정했다. 이래저래 축 가라앉는 기분에 밥맛이 떨어질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카레가 제격이다.
S&B의 골든 카레나 하우스 카레 같은 고체 카레를 사서 일본식 카레를 해먹을 때도 있지만 가끔은 내 식대로 태국식이나 인도식 카레도 해 먹는다.
마늘과 생강을 올리브유로 잘 섞는다. 감자 양파 당근을 종종 썰어 냄비 안에 넣는다. 토마토를 넣을 때도 있다. 으깬 토마토와 양파에서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저어주면 된다. 요구르트나 코코넛 밀크 없으면 우유를 조금씩 넣어 열심히 휘저어 끊이면 된다. 강황가루에 클로브와 쿠민을 솔솔 뿌린 후추 씨를 곱게 갈아 넣는다. 그다음에 월계수 잎 한 두어 장 입수. 집 안에 폴폴 퍼지는... 카레 향기~~~~ 정신이 나릇나릇 노근 노곤 해지면서 피곤이 훅... 한방에 달아나는 이 냄새. 세상에 왕후장상이 따로 있나. 맛난 카레를 먹고 등 따습고 배부른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그 어느 왕후장상도 부럽지 않다.
때때로 이런저런 반찬을 해 먹기는 하지만 매일 반찬을 따로 만들어 놓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주로 끼니때마다 볶음밥이나 카레 또는 파스타처럼 단품 요리를 주로 먹는 셈. 그런데 매 끼니마다 뭘 해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일이다. 아주 귀찮다. 그럴 때는 그냥 밖에서 사 먹는다. 그렇다고 외식을 매일 할 수는 없고. 문제는 사 먹는 밥은 쉽게 질린다는 것. 이래저래 밥상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때로는 나도 차려먹는 밥이 아니라 누군가 차려주는 밥을 맛있게 먹고 싶다.
밥...... 평생의 숙제.
그나저나 김의 매력에 푹 빠졌다. 윤기 좌르르 흐르는 갓 지은 흰쌀밥 한 숟가락 위에 착! 하니 김 한 장을 올린다. 그리고 그 위에 백명란젓 살짝 얹으면. 금상첨화.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역시 기본에 충실한 맛이 최고. 선물로 받은 김. 맛있다. 맛있어. 밥이 그냥 술술 넘어간다. 김, 김, 김. 너는 왜 이리 맛있는 것인가! 김의 새로운 발견. 아! 나는 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돌아오는 주면 아버지 기일이다. 어머니댁 본가를 방문한다. 얼마 전 어머니가 집에 들르면 카레를 해다오 부탁하셨다. 어쩐 일이지? 내가 요리한 카레를 드시고 싶단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어머니댁에서 요리를 한 적이 없었다. 가끔 연어도 요리하고, 명란 계란말이도 하고, 파스타도 하고, 카레도 하고, 오므라이스도 하고, 짜장밥도 하고, 오리구이도 했지만(주로 어머니가 평소에 해 드시지 않는) 내가 어머니집에서 하는 요리는 그 정도가 다다. 기본 한식은 해봤자 어머니에게 잔소리만 듣는다. 일 년 365일 쌀을 안치고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며 삼시 세끼 밥상을 차렸던 어머니의 손맛을 내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어. 뭐든 기본이 정석대로 하는 게 가장 어렵다. 좀 더 쉬운 지름길을 일품요리를 지향하는 나야 뭐....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다. 집에서 기본 장과 김치를 담그고 방앗간에 가서 떡도 뽑고 만두도 빚고 송편이든 시루떡이든 명절마다 절기 음식을 집에서 손수 했었던 어머니다. 어릴 적 엄마 따라 시장 가고 그랬다. 따라다니느라 고생했다고 늘 맛난 주전부리를 사주셨거든. 염불보다 잿밥. 사실 한식은 어머니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손맛 좋은 어머니의 밥상을 먹고 자랐다. 복이다. 나이 들어 독립해서 살다 보니 어릴 적부터 밥상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입맛과 손맛이, 야무지게 살림한 어머니의 눈썰미가 일상을 꾸리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여러모로 나는 운이 좋았다.
매년 손수 준비하던 갈비찜을 이번에는 홈쇼핑으로 처음 주문한 어머니. 수술 후에도 진통제를 먹으며 식구들을 위해 명절에 갈비찜은 해먹여야 한다던 그 어머니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 당신의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는 걸 실감하고 드디어 마음을 내려놓은 것이다. 해마다 키가 조금씩 줄어드는 어머니. 너무 안쓰럽다. 이제 내가 품에 안으면 아기처럼 포옥 안길 정도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나 무서웠던 호랑이 선생님 엄마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작고 귀여운 사람이 되었을까. 반 평생을 식구들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런 우리 엄마. 엄마. 올 설날에는 제가 차린 밥상을 받아보세요. 일본식 카레와 오믈렛으로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