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가족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밥상은 언제나 즐겁지만 간편하기로는 혼자 먹는 밥이 훨씬 낫다. 외식보다는 솔직히 집밥이 더 좋고. 비장이 허약해서 가리는 것도 많고 노인네처럼 느릿느릿 밥을 먹는 터라 밖에서 밥을 먹을 때 식당이 정신 없이 바쁜 시간대를 되도록 피한다. 서둘러 먹어야 하거나 초스피드로 빨리 먹는 사람이랑 식사를 하면 나도 모르게 신경을 쓰고 긴장하게 된다. 그러면 뱃속도 마음도 도통 편치 않다. 그래서 초면이거나 밥을 같이 먹어본 적인 드문 사람에게는 밥을 먹게 되는 자리에서 꼭 미리 말을 건넨다. 저는 식사를 아주 천천히 합니다. 기본 삼십 분은 걸려요.
말이 나온김에 한국인들 왜들 그리 밥을 빨리 먹는건가? 오 분 십 분 만에 빈 그릇을 보이는 남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군대 갔다 와서 그래. 너도 군대 갔다와 봐. 똑같지. 제대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그걸 이유랍시고 대는 건지. 고작 그 이 년 남짓한 기간이 자신의 식습관을 결정했다고 대답하는 건 어찌 좀 옹색한 변명은 아닌가?
영화판에서도 똑같았다. 일개 쫄다구 막내 스태프로 현장에서 일하려면 눈치껏 밥 먹고 감독 피디보다 빨리 밥 숟가락 내려놓고 자리에서 잽싸게 일어나야 했다. 연출부로 일할 때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연출부끼리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고 싸가지 없다고 감독에게 욕을 먹었다. 군대도 안 갔다온 내가 사회생활 군대 2부가 펼쳐졌다. 밥 먹는 거로 남의 눈치를 봐야한다니. 지금도 밥을 가지고 서열을 따지고 닥치고 따라야 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 울화가 치민다.
남자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자들중에도 빨리 먹는 이가 숱하다. 밥 먹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 지인 친구들이 있다. 넌 왜 그렇게 밥을 허겁지겁 먹니? 배가 고파서 그래? 내가 이렇게 물어보기라도 치면 다들 깜짝 놀란다. 자신이 밥을 빨리 먹는지도 몰랐다며 당황한다. 물론 내가 밥을 느리게 꼭꼭 씹어먹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음식을 음미하지도 않을 거면 천천히 느긋이 즐거운 담소와 대화를 즐기지도 않을 거면 왜 굳이 맛있는 식당,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하는 건가?
대화도 없고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으며 그저 밥그릇에 코박고 후루륵 쩝쩝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면서 게걸스럽게 목구멍으로 음식을 넣기에도 바쁜 사람들. 우리나라의 빨리 빨리 문화가 가진 장점이 무척 많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빨리 빨리 문화가 가져온 폐해를 하나 꼽자면 나는 빨리 빨리 먹는 식사 습관과 밥상 문화를 들고 싶다.
잠시 몇 달간 회사에서 단기알바를 한 적이 있다. 프리랜서의 직딩 생활 체험. 점심 시간마다 직원들이 다 같이 가서 점심을 먹는 식당이 있었다. 회사가 아예 출석부를 달아놓고 식비를 대는 지정 식당이었다. 직원들은 회사에서 내는 식대니까 부담없이 그 식당에서 점심 한 끼를 해결했다. 내가 워낙 천천히 먹는 통에 다들 내가 밥을 다 먹기를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걸 같이 해야된다고 믿는 사람들인가 뭔가. 숨이 턱턱 막혔다. 먼저 일어나세요. 저 알아서 먹고 갈 테니 기다리지 마세요. 아무리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아, 네, 괜찮아요. 편하게 드세요. 그러면서 맞은 편 자리에서 제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편하게 천천히 먹을 수가 있겠어. 내가 다 먹기를 기다리는 직원들, 밖에서 대기중인 손님들 생각에 체할 듯해서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점심 시간이 되면 직원들과 식당에 가지 않고 따로 빠져서 나 혼자 다른 식당에 가거나 샌드위치를 사서 공원에서 혼자 먹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에 커피를 마시며 나무를 올려다보고 햇살을 만끽하고 새소리를 듣는 시간은 참으로 여유로웠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가 공공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점심을 먹는 장면이 있다. 도심 속 소공원. 나무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올려다보며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햇살 한 줌 찰칵. 도심의 백색소음이 귓가를 스쳐지나가고, 어느 날은 아름드리 나무 앞에서 노숙자 한 명이 마치 살아있는 나무처럼 움직이고, 어느 날은 어린아이의 웃음이 잔잔히 흘러간다. 그 모든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건 햇살과 공기와 샌드위치와 우유에 그 순간에 오로지 집중해서라는 걸. 천천히 느릿느릿 흘러가는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여유라는 걸.
나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밥을 먹고 싶다. 적어도 일하지 않는 시간인 자유시간, 밥을 먹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밥과 음식에, 그리고 함께 먹는 상대에게, 그 누구보다도 밥을 먹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ㅡ오늘은 뭐 먹지?
어머니가 주신 깍두기 김치에 자반고등어를 굽는다. 곰취나물 장아찌와 가지볶음 그리고 김. 파프리카 완두콩 숙주를 멸치 피시소스에 버무린 동남아풍 볶음밥. 집밥으로 하루 시작. 밥상이 인생의 반이다.
모임 자리에서 먹다 남은 보쌈이 아까워 챙겨 왔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냥 두면 음식물 쓰레기라. 버려 말아하다가 짜장밥을 하기로 결정. 소스만 만들어 놓으면 짜장 파스타 짜장국수 뭐든 소스만 부어주면 되니 여러 번 먹을 수 있다. 매번 귀찮은 반찬을 만드는 수고를 더는 건 덤이다.
기본적인 감자 양파 당근에 냉장고에 있는 거 뭐든 넣으면 된다. 샐러드도 냉장고에 남아돌다 썩어갈 거 같은 채소를 모두 한 데 버무리면 된다. 역시 소스만 만들어주면 된다. 머스터드 드레싱 소스 샐러드 완성. 나물은 한 종류만 무쳐야 하지만 서양 샐러드는 채소를 다 섞을 수 있는 편리함 때문에 더 자주 해 먹는다. 후식으로 생강 강황을 넣은 차와 같이.
평소에 차려 놓고 먹는 거 별로 신경 쓰는 편이 아닌데 일전에 상차림 언급한 페친이 생각나서 보자기를 한 번 깔아봤다. 호오, 이래 놓고 먹으니 나름 고급 식당 부럽지 않은데! 더 맛있어 보인다. 이래서 상차림이 중요해 어쩌고 하는구먼. 끄덕끄덕.
볶음밥, 소스밥, 카레, 파스타, 샐러드.
귀차니스트의 필수 요리 목록.
때 되면 끼니 챙기기.
밥상이 살림이고 삶이고
내 몸을 내 정신을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