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편지쓰기 프로젝트

6월 공통주제 <연애> ㅣ 변채림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12 오후 3.32.13.png 건물덕후


대학 때는 일본어랑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교양으로 들었던 건축사가 너무 즐거워서 흔한 건물덕후가 되었습니다.
건축이라는 건 위대한 인류가 일궈나가는, 장대한 역사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건물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인간에게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작가 프로필 ㅣ 변채림

해가 중천에 뜨면 나가서 맥주를 마시고 공원이나 도시에서 광합성을 하는 게 제일 좋아하는 일과입니다. 햇수로 5년 차 인스타그래머로, 글보다는 사진으로 일기를 씁니다. 호주 멜번으로 이사온지 10년이 좀 넘었고 작년 초에 호주 여권을 받았는데도 영어는 여전히 삶의 장애물입니다. 미래에는 소박하게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게 꿈인 것 같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고정관념을 나도 모르게 체화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6월 3일 연애편지의 전문:



###에게


안녕 ##아 나는 너의 절친한 동반자 채림이라고 해. 지금 혜정이와 MCA에서 Telling Tales라는 전시를 보고있어. 이 편지는 리밍웨이라는 작가의 프로젝트로 1998년부터 계속됐대. 작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슬픔을 전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다른이와 공유하거나, 혹은 편지를 봉하면 뜯지않고 계속 보관해주는 프로젝트를 한대. 주소를 쓰면 실제로 보내준다길래 내가 아는 유일한 주소지에 사는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 이제 24시간 얼굴 못봤는데 허전하고 보고싶다. 우리 참 친한 것 같아 너무나.


지금 편지를 쓰는 이 공간은 원목을 사용해서 골조를 짰는데 3면은 불투명 유리로 두르고 한 면은 입구로 뚫려있어. 바닥은 계단 두 개 높이 단상이고 신발을 벗어야만 했어. 내부에는 벽면에 줄맞춰서 편지를 집게로 집어 놨는데 주소가 없는 편지들이 많다. 만날 수 없는 사람한테 쓴 편지들인가봐, 아까 가이드가 말해 준 것 처럼. 이런 공간이 세 개가 있는데 바닥에 앉아서 쓰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쓰는 책상,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서서 쓰는 책상이 각각 안에 있어. 그리고 옆 전시 공간에서는 리밍웨이가 또 다른 인터랙티브 아트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 의자에 아무 관람객 한 명을 앉혀놓고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건데 노래를 진짜 잘한다.


어쨌든 이제 손도 아프고 이만 써야겠어. 편지 쓰라길래 편지 쓸 사람 나는 별로 없는데 하다가 ## 생각이 났어.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인 것 같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다 아트가 되니까 뭐 이것도 예술에 참여하는 거겠지. 집에서 같이 편지를 읽으면 또 아티스틱한 일이겠다.

잘 지내고. 보고싶다 빨리. 같이 라면 끓여먹고 싶어.




라는 글을 뭉툭한 연필로 썼다. 따뜻한 흰색, 미술관 이름이 프린트 된 종이였다. 그제의 나는 비행기로 한시간 반 떨어진 도시에서 미술전을 보고있었다. 5박 6일의 일정은 온전히 비엔날레를 위한 것이었는데 막상 와보니 여행 날짜에 맞춰 온 태풍이 1970년대 이후로 최악을 기록했다는 뉴스보다 덜 인상적인 작품들의 나열이었다. 리밍웨이의 작품은 비엔날레 디렉터가 아니라 현대미술관이 자체적으로 준비한 전시의 일부였다. 1998년부터 시작한 Letter Wiriting Project는 어느 곳에서나 같은 형식인 듯 하다. 세 개의 부스가 있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맨 바닥에 앉거나, 의자에 앉거나, 서서 편지를 적는다. 대만계 미국인인 작가는 불교의 세 가지 명상 자세를 염두에 두고 높이가 다른 가구들을 준비했다고 한다. 불투명 유리로 시야가 막힌 각각의 공간에서 관람객들은 따스하게 고립된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애 처음 사랑했던 사람을, 조금 있다 만날 엄마를 찾아서 입으로는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문장으로 남김으로써 마음의 고요와 자기 통찰을 얻는다면 실제 명상의 의의에도 맞는 행위일 것이다.


나는 돌아가신 주변인들 대신 매일 보고 만질 수 있는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쓰는 엽서처럼 가볍게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적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가지는 연애 감정에 대한 진지한 글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런 감정들을 지극히 상투적인 표현에 담는 것만큼은 서툰 사람들이다. 서툴다고 해야할지, 그런 간질거림을 참을 수 없다. "love you hon" 하고 "I truly love you"는 아시아대륙과 오세아니아대륙의 체험적 거리만큼이나 멀다. 전자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후자는 먹먹하고 막막하다. 그래서 전시 후기같은 글을 적고 연애편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편지가 언제 도착할까, 같이 읽으면서 쓸데없는 농담을 걸고싶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데서 썼어 하고 말하고싶다, 내가 이런 안하던 일을 했으니 좋아했으면 좋겠다 라고, 상대가 기뻐하길 바라며 들뜨는 마음속의 이것이 연애감정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이런 종류의 작품은 2016년의 미술관에서 별나지 않다. 이런 종류라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에 일일히 라벨링을 붙이고 수고스러운 절차들을 준비해 관람객이 에술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꾸며놓은 작품들을 말한다. 나는 이런 작품이 일상적인 행위들을 억지로 예술의 경지로 올리려고 노력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리밍웨이의 편지쓰기 프로젝트가 나에게만큼은 성공적이었던 이유가 새 가지 있다. 첫째로, 만날 수 없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도록 응원하는 공간에서 명상의 세 가지 자세를 인용한 것이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편지쓰기는 명상과 비슷하다. 둘째로, 내 안의 연애편지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대상화하고 정립했다. 내가 연필을 움직여 써낸 것이 그냥 애인을 독자로 한 전시 후기인지 연애편지인지를 정하는 척도는 글 자체의 내용보다 내가 가진 무형적인 감정들이다. 마지막으로, 리밍웨이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편지쓰기를 즐겨 하지 않는 내가 연애편지를 적을 일은 한동안 없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쓴다는 클리셰에 처음 동참한 것 같아 화젯거리가 하나 늘었다.


글을 쓰는 동안 친구에게 비가 그쳤다는 연락이 왔다. 몇 달치 맞을 비를 며칠동안 다 맞았는데도 여행은 즐겁다. 또 얘깃거리를 많이 늘려서 돌아가야 겠다. 남자친구와 만나면 우리가 너무나 즐겨먹는 인스턴트 라면앞에서 여행에서 겪은일들을 풀어놓고 싶다. 편지쓰기프로젝트의 감상문을 쓰려고 시작한 이 글에도 개인적인 감정들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이 글이 또다른 연애편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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